상추씨는 흙 대신 빛
[매거진 esc] 지마켓과 함께하는 시골 밥상 공모전
남향 아파트로 이사 와 처음 맞는 봄, 오후 내내 머물다 가는 햇볕을 아까워만 하다가 베란다에서 뭔가를 키워보기로 했습니다. 3월 첫째 주 일요일에, 스티로폼 딸기 상자 세 개에 가장 만만한 상추를 뿌렸습니다. 적상추·청상추 구색도 맞췄습니다. 씨 뿌리고 일주일 후에 가면 우수수 싹들이 올라왔던 주말농장 경험에 비추어, 아이들에게도 “금세 싹이 올라올 거야”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이주일이 지나도 화분에서는 아무 낌새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며칠 후 겨우 흙을 뚫고 올라오는 몇 가닥의 싹을 발견하곤 ‘내가 너무 조급했어’라며 기쁨에 젖은 것도 잠시, 그 뒤로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상추 먹긴 다 글렀네.” 듬성듬성한 밭(?)을 보며 내뱉는 남편의 말에, 상추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졌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주지 않는 상추 싹들을 원망하며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상추는 광발아종자.” 광발아종자란 싹 트는 과정에서 빛이 필요한 씨앗을 말합니다. 씨를 뿌리고 흙을 덮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상추 포장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는 쑥 들어가게 구멍을 파 상추씨를 넣곤 흙으로 메워버린 나의 파종 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도전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땅을 뚫고 올라온 몇 가닥의 상추는 뽑아 먹고, 다시 물을 뿌린 후 손가락으로 밭고랑을 낸 뒤 상추씨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사나흘 만에 씨에서 솜털 뽀송뽀송한 뿌리가 내리는 걸 볼 수 있었고, 일주일 후에는 초록 싹들이 올라왔습니다. 요즘은 상추 하나라도 생명을 싹 틔운다는 게 허투루 되는 일이 아님을 느끼고 겸손한 마음으로 알뜰살뜰 상추를 돌봅니다.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가져온 다른 스티로폼 박스엔 토마토와 고추 모종을 심어 농사를 늘릴 생각입니다.
신민자/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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