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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얼마 전 티브이에서 범상치 않은 사회자 한 명을 만났습니다. <파워클래식>(예당아트) 엠시 조윤범씨가 이쪽저쪽을 뛰어다니며 슈만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요새 예능 엠시들이 격의 없이, 때론 ‘싹퉁머리’ 없이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순정 어린 노력이 신선할 지경이더군요.
이제 막 말하기에 재미를 붙인 꼬마가 이걸 본다면 엠시의 화법을 모방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란한 손짓, 드라마틱한 말투가 극적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제 유년기를 사로잡았던 추억의 엠시들이 기억났습니다. 기억나는 엠시를 꼽으라면 단연 <가요무대>의 김동건 아나운서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이덕화씨가 아닐까 싶습니다.
<토토즐>의 이덕화씨는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마이크를 장난감처럼 가볍게 휘어잡고, 여성 진행자가 멘트할 때면 마치 오빠인 양 진행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표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빛나는 쇼의 명품! 메들리 콘서트 테이프를 끊을 첫 주자, 댄싱의 여왕 김완선양 부~탁해요!”라는 음성에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힘이 있었습니다. 부탁한다고 말은 하지만 어디 부탁한다는 사람의 태도였나요?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주최자가 기분 좋게 ‘부탁하니까 보여줘 봐’라는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가요무대> 김동건씨의 진행은 한국식 정서와 절제가 담긴 어떤 미덕을 상징했습니다. 동요 없는 음성으로 이렇게 인사했지요.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해외에서 이 시간에도 땀을 흘리고 있는 근로자분, 안녕하십니까.” 과연 지구 어디까지 이 멘트가 전달될까 궁금했습니다.
엠시는 이덕화씨처럼 힘을 배분하기도 하고, 김동건씨처럼 말의 도착지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부탁해요”와 “해외동포”를 간만에 발음하다 보니 내 말만 하려는 100명의 연설가보다는 1명의 명엠시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현시원 기자
※앞으로 4주 동안 기자들이 ‘esc를 누르며’를 번갈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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