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석모도(1995년)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사진 찍어온 김문호…20년 만에 개인전 열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사진 찍어온 김문호…20년 만에 개인전 열어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문호(57)는 ‘오늘’을 찍는다. 그가 20년 넘게 채집한 오늘의 풍경들이 모여 서울 광화문 문화일보 갤러리에서는 13일까지 전시회 <온 더 로드>(On the road)가 열린다. 20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동시에 <성숙에 이르는 명상>, <인디언 추장 연설문>, <의자> 등 수십권의 책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로 살아온 김문호는 그간의 사진 작업을 동명의 책으로도 묶어 세상에 내놓았다.
느린 속도로 담은 오늘의 이야기
그런데 왜 하필 ‘길 위에서’(On the road)라는 제목일까. 머리는 희끗하지만 청년 같은 생생한 눈매를 한 김씨는 “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내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는 도시 속 인물과 풍경을 접할 때마다 셔터를 누른다”고 말한다. 연출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고집하는 그는 ‘채집’이라는 말로 자신의 사진 행위를 요약한다. 멋있게 대상을 포장하는 대신 현실의 울퉁불퉁한 피부와 부조리한 뼈대를 있는 그대로, 섬세한 관찰자가 되어 현실을 채집한다. 이런 채집 과정은 그의 표현대로 바쁜 도시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절한 삶을 보여주는 “증언의 한 모퉁이”가 된다.
김문호의 사진 속에 담긴 오늘은 대한민국의 1990년 초부터 2000년대를 넘나든다. 흑백사진 속에 담긴 순간들은 바로 오늘 아침 뉴스 이미지를 보듯 생생하지만, 동시에 역사 교과서에 실린 도판처럼 시간의 눅눅한 흐름이 느껴진다. 1991년 지하철 구로공단역의 출근하는 남자들과 1997년 서울 마포대교를 가로지르는 오토바이 운전사, 2003년 고향에 전화하느라 분주한 경기도 안산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의 손을 통해 사진 속에서 여전히 ‘오늘’을 증언한다. 그가 채집한 오늘의 중심에는 도시에 몸을 부대끼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집의 부제로 달린 ‘질주, 그 허망함에 관한 보고서’ 문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진들이다.
오늘 찍은 사진도 내일이면 의미가 변할 만큼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간다. 하지만 김문호는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는 데 여유롭고 느긋하다. 수많은 사진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데 급급한 것에 비해 “느림”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예술대학을 나와 유명한 사진가의 삶에 사진을 향한 열망을 불태웠다는 식의 일부 사진가들과 달리 그는 신학대학을 나와 출판사에 근무하던 중 취미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게 됐다. 1989년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1990년에는 사실적인 사진작업을 하는 동료들과 ‘사진집단 사실’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시대 현상을 기록했다.
더딘 듯 보이는 그의 전시 이력에는 “급하게 욕심부리지 말고 현실을 차분하게 기록하고 담아내자”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2005년 인권사진전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와 2003년 인권사진전 <눈밖에 나다>에 실린 그의 사진들에도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애정의 시선이 담겨 있다. 장애인 가족과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사진을 담아낸 작업에 대해 김씨는 “장애인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우울하지도 않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불편하고 그걸 받아들이고 살지만 나름대로 행복이 있고, 인간적인 아름다움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 소수자들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인종주의적이다”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장면 속 주인공보다는 조연에 가깝다. 어딘가 상처 입은 듯, 외로워 보이고 노동에 지쳐 고단해 보이지만 소리 질러 ‘아프다’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게 오늘을 보내는 이들의 기록이다. 표정을 볼 수 없는 뒷모습의 남자들, 술을 먹고 동그란 상에 머리꼭대기를 받은 회사원들, 지하철 귀퉁이에 물끄러미 앉아 있는 타국의 청년들은 모두 김문호가 만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이름 없는 ‘작은 존재’이다.
앵글을 채우는 ‘작은 존재’들
그의 사진집에 글을 쓴 소설가 최옥정의 말처럼 김문호가 기록한 평범한 인물들은 그의 사진에 박혀 있는 시대상을 건져 올리는 촘촘한 그물이 된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와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궁금하다면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사진을 살펴보라.” 지하철 플랫폼, 거리의 주유소, 부산 광안리의 해변가, 대학로의 풍경, 밤길의 포장마차, 안산 이주노동자들의 마을. 그가 십수년간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길들을 모으면 사람 냄새가 진하게 나는 도시의 이면을 담은 지도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도시는 오늘도 숨 가쁘게 달린다. 김문호의 사진은 느린 듯 꾸준하게 이 도시를 향한 주파수를 놓치지 않고 있다. 영화 <아이다호>에서 ‘길은 끝이 없다. 그래서 세상 모두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한 주인공처럼 김문호는 길 위에서 쉬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글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사진 제공 김문호
서울 구로공단역(1991년)
경북 울릉도(1991년)
서울 시흥(1993년)
서울 명동(1991년)
서울 종로3가(1990년)
사진가 김문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