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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발췌번역 출판’ 우려스럽다

등록 2008-02-15 19:39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

“인문서를 읽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한 가지만 충고하겠다. 좌익 사상을 다룬 문헌을 원전(번역이라도 좋음)으로 읽어보라. 입문서나 관련 서적을 읽으면 잊어버리지만 원전을 읽으면 의외로 잊히지 않는 법이다. 단 요약된 책을 읽으면 그런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의 시사잡지 〈논좌〉 2007년 3월호에 발표한 〈인문학의 가능성-역전을 기다리며〉란 글의 일부다. 만약 누군가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천 줄로 발췌 번역해서 책을 펴내겠다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뒤로 나자빠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책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나섰다. ‘지만지 고전 천줄’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이 대형기획의 출간예정 목록에는 〈근대문학의 종언〉뿐만 아니라 최명희의 〈혼불〉, 김주영의 〈객주〉 같은 대하소설과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 같은 장편소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같은 방대한 인문서도 포함돼 있다. 4년 만에 모두 3600권을 펴내겠다는 야심 찬 기획이다 보니 웬만한 고전은 다 들어 있다. 한 러시아 전공자에 따르면 러시아 쪽 타이틀만 160권이라 거의 모든 전공자가 이 작업에 달려들고 있단다. 1차로 출간된 30권 중에는 완역돼 지금 팔리고 있는 책들도 있다. 문학작품인 한 책은 국내에 출간된 지 1년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책의 내용을 6분의 1정도로 발췌했다. 해당 출판사가 반발할 것은 당연한 일. 같은 제목에 같은 역자의 책이니 말이다. 이것은 엄연히 출판권 침해다. 수많은 출판사가 공을 들여 일궈놓은 밭에 무임승차하다시피 하는 이런 발상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게다가 목록에는 저작권이 살아 있는 책이 종종 눈에 띈다. 해당 출판사들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물론 기획 의도가 전혀 읽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을 데이터베이스화된 콘텐츠로 보는 것이다. 이 방대한 내용을 전자책으로도 출간하고 검색도 가능하도록 한곳에 모아놓는다면 꾸준히 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익을 창출한다면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더구나 이중계약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작업에 참여하는 번역자나 저자가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은 이 땅의 저열한 지적 풍토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초역을 해서 내놓은 사람은 예외다.

해외에서도 발췌본이나 요약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인정받는 발췌본이나 요약본은 청소년용이 아닌 한 그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문가가 수많은 고민 끝에 고전을 제대로 압축해낸 것이다. 번역자가 임의로 적당히 발췌한 글을, 더구나 문학작품을 멋대로 발췌해서 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본디 인문학이란 과거의 텍스트와 마주하는 학문이다. 전공자가 고전 원전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실력이 없다. 그러니 최대한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 번역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다. 따라서 이 기획이 진정 성공할 수 있으려면 국내에 초역되거나 절판된 책의 완역을 통해 한 권씩 정성 들여 만드는 것으로 규모를 축소해야 마땅할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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