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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고 진시황은 진정 일을 했다

등록 2006-06-29 17:26수정 2007-04-26 16:08

2006년은 중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40돌이 되는 해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만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장차 또 어떻게 바뀌어갈까. 지난 2일 베이징 시장의 문화대혁명 기념품 가게에서 손님이 마오를 추억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
2006년은 중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40돌이 되는 해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만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장차 또 어떻게 바뀌어갈까. 지난 2일 베이징 시장의 문화대혁명 기념품 가게에서 손님이 마오를 추억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
산 비가 내리려니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마오 암살 기도한 ‘린뱌오 사건’ 계기로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 욕했습니다”
마오, 진시황이 그랬듯 공자 비판 ‘비림비공운동’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⑤

아큐가 아니라 IQ가 75인 포레스트 검프가 항상 바보 같지는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포레스트가 미국 탁구 대표팀 선수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인상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어눌하지만 매우 ‘예리하게’ 중국을 단 두 문장으로 개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거의 가진 게 없어요.” “그들은 교회에 가지 않아요.” 사회자는 상상(imagine)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포레스트 검프 옆에 앉아 있던 딱정벌레(비틀즈) 그룹의 영혼, 존 레논은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마치 그의 불후의 명곡 이매진의 노랫말처럼. “상상해보세요 국경이 없는 세상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굴 죽이거나 죽을 이유도 없겠지요 / 종교도 없어지겠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없다면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될 텐데/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로버트 제멕키스 감독은 포레스트 검프의 입을 통해 미국의 보수세력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존 레논과 같은 반전 평화주의자들이 꿈꾸는(이매진) 세상, 즉 종교도 없고 소유도 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의 포레스트 검프가 방문하고 돌아온 “가진 것이 없고 교회도 가지 않는” 다시 말하면 지독하게 가난하고, 신을 업신여기는 불경스런 중국과 같은 세계라고 슬쩍 비꼬고 있는 것이다. 성동격서.

사실 1971년 4월10일부터 17일까지 미국 탁구 대표단과 기자들이 방문했던 당시 중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했으며 물론 교회에도 가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동란’의 와중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대혁명이라는 인류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대격동, 대실험 속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미국 선수단이 이러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직전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중국쪽의 방문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핑퐁외교’ 없었다면 동유럽 신세

1972년 2월 냉전체제를 뒤흔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 때 중국 노동자들과 얘기하는 닉슨 대통령.
1972년 2월 냉전체제를 뒤흔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 때 중국 노동자들과 얘기하는 닉슨 대통령.
이를 두고 핑퐁외교라고 부르지만 마오는 1970년에 에드거 스노를 만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초청 의사를 전하는 등 이전부터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벗어나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닉슨 대통령은 197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이 소련을 겨냥한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은 것이다. 문혁의 와중에 있었다고 해서 중국이 10년 동안 세계와 단절되어 국내에 대혼란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와 같이 향후 새로운 동북아 구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때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 소련 일변도로 나아갔더라면 중국은 오늘날 동유럽의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린뱌오(임표) 사건이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문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등 급부상하여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의 후계자로까지 지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마오 암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연료 부족으로 몽고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로 마오와 이전부터 충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린뱌오 사건이 당시 일흔 여덟 살의 마오에게 끼친 정신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는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에 가입하여 대장정을 함께 했으며 결국 후계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군부 내에 그의 세력들도 많이 있었다. 마오의 권위도 추락했고 공산당에 대한 신뢰도 하락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마오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유가에 반대한 루쉰을 다시금 떠올렸다. 린뱌오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후 마오는 한 좌담회에 참석해서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한다. “나는 동지들이 루쉰의 잡문을 보기를 권합니다. 루쉰은 중국의 제일의 성인입니다. 중국의 제일의 성인은 공자가 아닙니다. 나 또한 아닙니다. 나는 현인(賢人), 즉 성인의 학생에 해당합니다.” 이는 일찍이 옌안에 있을 때 루쉰을 논하면서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고 한 발언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만년의 마오는 더 이상 루쉰과 공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병칭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산 비가 내리려니 (중국이라는)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1973년 드디어 공자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마오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이집트 부총통을 접견했을 때 외빈들 앞에서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입니다. 나도 진시황입니다.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진시황이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파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합니다.”라고 천명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진시황이 뭐가 대단한가? 그는 단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6천여명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고 진시황 같다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인정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말한 것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가 더 보충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1958)

린뱌오, 소련으로 가다 비행기 추락

그가 공자에 반대하고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은 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을 따름이지만 진시황은 진정으로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를 받드는 사람들이 평소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진시황은 어떤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세습을 인정하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진시황은 집중제의 한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마오가 진시황과 공자를 병칭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빈말을 한” 공자였지만 그러한 공자 사상의 영향력은 중국에서 정말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중국에서 공자는 지식인들의 ‘교주’였다. 이러한 사정은 공산당에 반대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저명한 사학자인 궈모러(郭沫若)와 같이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과 함께 한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궈모러는 <십비판서>(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중국 고대 사상사>)에서 일찍이 공자를 인본주의자로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었는데, 마오는 이를 두고 그가 공자를 받들고 법가에 반대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입장은 국민당이나 린뱌오의 견해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공자 비판을 린뱌오 비판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마오의 생각은 장칭을 위시한 사인방에 의해서 대중운동으로 증폭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비림비공’운동이 그것이다. 공자는 노예제로부터 봉건제로 이행하는 춘추말기에 몰락한 노예주 계급을 대표해서 노예제 부활을 도모한 보수반동의 사상가로 평가되어 비판받기에 이른다. 사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과유불급)는 공자의 중용 사상은 마오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공자의 사상과 옛 것을 타파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마오의 혁명사상은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림비공 운동은 이미 린뱌오 사건 이후 이미 빛을 잃어버린 문혁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한 비극이었다.

‘과유불급’ 공자사상 마오와 상극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지난 5월은 마침 문혁 발발 40주년을 맞는 달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이 문혁에 관한 보도를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우리 언론에 약속이나 한 듯이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유명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에 문화대혁명을 검색해보면 “당신의 검색어는 법률에 저촉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뜬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에서 한번 해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혁이라고 치니 수많은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니 ‘문화대혁명’마저도 이상이 없었다. 문혁은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 그동안 중국의 주류적 관념이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유명한 작가인 한샤오꿍이 “편견을 더하거나 기억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빈궁한 대국이 급속히 발전하려는 가운데 겪은 재난은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겪는 사랑 혹은 원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문혁 담론을 비판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과거사 청산을 말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남의 문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거나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쉽게 비판하는 것은 ‘아큐’의 정신승리법이 아니면 ‘포레스트 검프’의 복잡한(?) 단순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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