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는 땅 밑에 있는 극장이 아니라 색다른 극장을 찾아가고 싶다. 산꼭대기라도 올라가고 싶고, 숲 속, 바닷가라면 더 좋겠다. 연극을 보러 일주일에 한번씩은 대학로에 있는 극장을 가지만, 그 위치는 거의 똑같다. 연극은 지금 건물 아래 땅 속에 있다. 표를 받으면 버릇처럼 땅 속으로 기어 내려간다. 자리는 비좁아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참 지긋지긋한 노릇이다. 올해로 ‘극단 76’은 30년, ‘극단 자유’는 40년을 맞이한다. 6·25전쟁 이후, 참 많은 극단들이 생겨났고, 사라졌다. 이들 극단은 참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더 많은 신생 극단들이 존재한다. 극단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그만큼 연극이 필요했고, 연극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연극이 실제의 삶을 가장하는 가짜가 아니라 삶의 복수성과 같은 허구라고 한다면, 극단은 생명이며 허구일 터이다. 거짓과 현실에 기반을 둔 예술작품처럼, 생명과 허구의 두 주인을 섬기는 집단이 극단일 터이다. 생명이 굽히는 굴(屈)이라면 허구는 뻗치는 신(伸)이다. 극단의 정신은 굴신의 관계가 끊임없이 반복될 때 분명해진다. 극단은 생명이면서 허구이며, 허구이면서 생명으로 존재한다. 길 위의 나그네가 지니는 황홀함은 굴신의 상상력이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걸어가는 생명의 나그네로 여기지만, 점차 자기 자신이 허구의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꿈과 생시는 차이가 없다. 좋은 연극과 함께하는 극장에서의 경험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극단이 있어야 연극이 존재하게 된다. 공연을 해야만 연극과 연극의 정신을 낳을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공연하는 터, 즉 극장이 앞 세대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연극의 대부분은 대도시 건물의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 몇몇 큰 극장을 빼고는 소극장이라고 하는 것들인데, 지하공간을 개조해서 극장으로 만든 공간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그 공간은 이 극장, 저 극장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공간의 크기는 협소하고, 공간의 분할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다. 극장이란 공간이 같다면, 그곳에서 생산되는 공연도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오늘날 공연이 대동소이하다는 비판을 듣는 것은 극장공간의 획일성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한 여름, 필자가 경험한 몇 개의 재미난 극장공간을 언급해야겠다. 프랑스의 파리 근교에 ‘수영장’이라는 극장이 있다. 극장 ‘수영장’은 실제로 1930년대에 만들어진 수영장이었다. 1979년 샤트네-말라부리라는 조그만 마을(우리의 구 단위)이 고정된 장소 없이 떠도는 ‘극단 캉파뇰’에 버려진 수영장을 맡아 극장으로 이용하도록 요청했다. 이 마을은 우리의 농촌처럼 많은 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 텅 비어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과 마을을 되살리기 위하여 유용성을 낳는 공장이나 병원이 아니라 그 반대에 속하는 극단을 유치했다. 극단은 논의 끝에 주민들의 제안을 수용하고,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무대 공간과 카페, 무대공작실, 연습실, 사무실을 수영장 안에 두었다. 1985년부터 이 극단은 자신의 이름 외에 이 마을 극단이 되었고, 정부로부터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한 극단에 의해서 버려진 수영장이 연극창작과 만남 그리고 상상력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이 극단의 첫 프로젝트는 ‘도시가 말한다’였다. 그것은 배우들이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과 추억의 이야기를 모아서 작은 공연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면서 마을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극장에 오게 되었고, 이 극단은 자신들의 연극공간의 모델로서 수영장으로 만든 극장을 더 늘릴 수 있었다. 배우들은 2미터 정도로 패인 수영장이란 공간에 빠져서 연기를 한다. 수영장은 무대 위가 없는 지하 동굴무대 같다. 수영장 바닥에서 연기하는 그들은 관객들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관객들을 올려다보면서 연기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극단은 새롭게 연기하는 방식을, 관객들은 달리 연극을 보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극단이야말로 본받아야 할 모델을 구하지 않고 필요와 욕망에 따라 스스로가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여름이 되면 이런 수영장 극장을 해봄직 하다.
또 다른 극장의 형태는 아예 시골로 가서 자리잡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도시를 떠나 산 속 폐교로 극단을 옮겨가서 함께 생활하며 연습하고 공연하는 극단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서도 공연한 적이 있는 프랑스 ‘태양극장’의 연출가 아리안 무뉘쉬킨은 1970년대부터 연극의 중심인 파리를 떠나 외곽 공원 숲에 자리잡고 새로운 극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극단은 버려진 무기창고를 극장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일련의 공연들이 큰 영향을 끼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관객들은 중간 휴식시간 때에 배우들이 직접 만들어 파는 샌드위치를 사서 같이 먹는다.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배우들의 부엌에 들어가 이들의 공동생활을 경험할 수 있고, 극장에 있는 카페에 앉아 배우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또한 공연 전 표를 팔고 있고, 극장 앞마당을 쓸고 있는 연출가를 만나 볼 수도 있다. 올 여름, 밀양의 한 폐교에 가면 이와 같은 ‘연희단 거리패’라는 극단을 만날 수 있고, 거창 수승대에 가면 숲 속에서 며칠이고 연극을 볼 수 있다. 참, 춘천도 있다.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