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⑥
지난 달 13일 중국에서 공자 표준 조소상(彫塑像)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산동성 문화산업박람회 조직위원회와 중국공자기금회가 산동성 지난(濟南)에서 공자의 표준상 시제품(初稿)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공모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하니 아무리 완성품이 아니고 시제품이라고는 하지만 급조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엄격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육칠십 대의 공자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향후 지속적으로 국내외의 여러 의견을 참고하여 오는 9월 공자 탄신 2557주년 제사 때에 최종 완성본을 정식으로 전세계에 공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제 공자상마저 국제적 표준이 제정되는 것이다.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돈도 재물도 없는 공자 사당은 썰렁
이러한 소식은 그간 간간이 들려오던 공자학원(Confucius Institute)의 세계적 확산, 공자에 대한 성대한 제사 그리고 유가 경전 읽기 붐 등 일련의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공자의 위상이 중국 전통문화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에 극복해야 할 구질서나 봉건문화의 상징으로 매도되던 공자가 21세기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세기에 공자의 신세가 ‘하한가’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상종가’를 구가하던 시절도 없지 않았다. 민국시대였던 1925년에 교육부가 주관해서 소학교에서 유가 경전을 읽도록 한 경우도 있었고, 1930년대에는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유(四維, 예의염치)와 팔덕(八德, 충효인애신의화평)과 같은 유가 도덕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신생활운동의 본질은 일본이 무력침공을 기도하자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구국의 기운에 대항해서 장제스 일파가 자신들의 군사독재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국민적 정신동원을 도모하려는 데에 있었지만….
작가 루쉰의 고향 샤오싱의 시엔헝 주점 앞에 서 있는 쿵이지상. 쿵이지 손가락 사이의 작은 물건은 소설에 등장하는 회향콩이다. 쿵이지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나눠줄 콩이 없다고 하면서 “군자는 다재다능한가, 다능하지 않은 법이다.(君子多乎哉 不多也)”라는 공자의 말을 연상시키는 “많지 않아. 많지 않아. 많은가? 많지 않다(不多不多 多乎哉 不多也)”라고 주절거린다.
돌이켜보면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교화된 이후 청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수천 년 동안 공자의 형상은 역사적으로 부침을 겪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폄훼보다는 포양된 경우가 많았다. “성인과 왕은 마치 한 핏줄인 쌍둥이 형제처럼 도처에서 궁지에 빠질 때마다 서로 의지하는 구석이 있다. … 왕은 그의 칭호를 성인에게 나누어 주어 왕이란 글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인 또한 그의 칭호를 왕에게 나누어 주어 ‘성(聖)’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후흑학(厚黑學)의 창시자 리쭝우의 이러한 지적은 역사적으로 공자가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밀의 한 자락을 말해준다.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고 당대의 임금은 언제나 ‘성군’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공자의 사당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스개 소리 하나. 공자의 사당(文廟)은 한적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관운장을 모시는 관제묘(關帝廟)라든지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묘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래 하루는 공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나의 사당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 사당엔 기도하는 사람들의 향냄새가 가득하냐고. 그들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돈도 없고 칼도 없는데 누가 당신에게 와서 향불을 바치겠냐고….
5ㆍ4 시기의 공자를 타도하자는 타도공가점의 구호나 문혁 때의 비림비공 운동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20세기의 공자는 쇠락한 문묘에서 몇 몇 제자들과 정겹게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신세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공자는 칼 마르크스라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마치 700여년 전쯤에 주희(朱熹)를 통해 부처를 만났듯이. 궈모러의 역사소품 모음집인 <족발(豕蹄)> 가운데에는 이러한 공자와 마르크스의 세기적 만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목은 ‘마르크스, 문묘에 가다’(1925년)
마르크시즘 공자 통해 중국에 뿌리
최근 발표된 공자 표준상. <중국사상사>로 유명한 전 국가도서관장 런지위는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온 마르크스가 공자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의 문묘(文廟)를 찾아갔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를 찾은 것은 어떤 사람한테서 자신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자신의 사상이 정말로 공자의 사상과 모순된다면 공자의 사상이 여전히 보편적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중국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공자는 안회, 자로 그리고 자공과 같은 가까운 제자들과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고 있던 중이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수염많은 게같은(개가 아니라) 얼굴을 한 인물이 마르크스라는 것을 안 공자는 크게 기뻐한다. 공자도 이미 마르크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10월 혁명의 포성이 중국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지만 공자는 자신의 사상이 체계가 없다며 사양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먼저 자신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마르크스는 우선 자신의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이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있음을 밝힌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사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마르크스는 만인이 한사람처럼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그들 모두 있는 힘껏 일하되 보수를 바라지 않으며, 생활 보장을 받아 춥고 굶주릴 걱정이 없는 이른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공산사회가 바로 자신의 이상적 세계라고 말한다. 이 말에 점잖은 공자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가 만인의 것이 된다. 사람들은 현자와 능력있는 자를 선출하며 믿음과 화목을 중시하게 된다.…재물이 헛되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이 독점하지도 않는다. 힘써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위해 힘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신의 대동(大同)세계의 이상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냉정하게 자신의 이상이 공상가들과 다르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자 당신은 기껏해야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도 걱정하고 균등하지 못한 것도 걱정하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자 공자는 물질을 존중하는 것이 본래 중국의 전통사상이었으며, 이러한 중국의 전통사상과 자신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산업을 발전시킨 이후에 균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마르크스는 2천여년 전 이 먼 동방에 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공자보다 노자가 빈말쟁이
이는 궈모러가 마르크시즘이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어낸 가상적 이야기이지만 여기엔 두 사람의 핵심 사상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공자와 마르크스를 화해시키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궈모러의 이러한 노력은 나중에 마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민주제) 플러스 진시황(집중제)을 자임했던 마오가 공자를 비판한 것은 그가 빈말쟁이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오가 높이 추앙했던 루쉰은 노자와 비교하면서 공자를 이렇게 긍정한 적이 있다. “공자와 노자가 논쟁을 벌였을 때, 공자가 이기고 노자가 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자는 부드러움(柔)을 숭상한다. (유가의) ‘유(儒)는 유(柔)’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공자도 부드러움을 숭상한다. 그러나 공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나아갔고 노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물러섰다. 관건은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 하는’ 실행자였고, 노자는 큰 소리나 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공담가였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언가 하나라도 하려면 한계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의 표준상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사실 공자의 모습은 하나일 수 없다. 부처와 대결했던 주희의 공자에게서는 어느덧 선사(禪師)의 분위기가 배어 있고, 세계 정부를 구상했던 캉유웨이의 공자에게서는 분열된 난세 속에서 통일을 체현하고자 있는 힘이 느껴진다. 불안한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논어>를 읽다가 문득 문득 공자에게서 ‘공을기’(쿵이지: 루쉰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주인공)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마도 잘못 보았을 것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