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연 패션 어드벤처
2003년도에 미국에서 출판된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가 6개월 동안이나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렀을 때에도 이 책이 한국 땅에서도 그만한 인기를 누릴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특수한 미국 패션계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는 내용이 한국 대중들의 정서를 파고들기에는 좀 낯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 소설은 이미 서울의 대형 서점 소설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 먼저 개봉된 메릴 스트립 주연의 동명 영화(사진)의 국내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들도 있다. 화려한 별천지 같아만 보이는 ‘패션 월드’가 대한민국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도대체 ‘악마’는 누구이고, 프라다는 왜 입는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는 패션 산업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션잡지 〈런웨이〉의 절대 권력자이자 편집장인 미란다 프리스틀리. 부하 직원들의 감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극단적인 완벽주의자이며 크리스마스에는 전세계 최고급 브랜드들로부터 받는 선물이 256개나 되는 여자, 신인 디자이너 한둘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막강한 이 여자가 바로 악마 편집장 미란다다. 그녀가 입는다는 프라다라는 브랜드 역시 최고급이자 결코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레이디 룩만 고수하니, 콧대 높은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브랜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실제로 현재 미국 〈보그〉 잡지의 편집장인 아나 윈투어의 어시스턴트를 1년간 해본 경험이 있는 로런 와이스버거가 구성한 소설로서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당시, 미란다에 대한 묘사가 실제 아나 윈투어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보니 일반 대중들은 책의 내용이 곧 실화가 아닐까 하는 오해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과연 국내 패션잡지 편집장들도 미란다처럼 안하무인에 명품 백을 수도 없이 선물 받는 ‘공주님’들일까, 패션 에디터들은 모두들 키 170㎝, 몸무게 50㎏ 미만에 완벽한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는 ‘우아녀’들일까,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나온 것처럼 패션잡지사의 샘플실은 옷과 백·구두로 가득한 ‘보물섬’일까? 대답은 노! 작자인 와이스버거가 경험했던 미국 패션 잡지사의 현실이 다소 비슷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 패션 잡지계의 현실을 보자면 이것은 분명 거리가 먼 허구일 뿐이다. 오히려 한 달에 한번씩 시달리는 밤샘 마감과 주말을 가리지 않는 업무 패턴, 엄청난 무게의 옷 짐도 번쩍번쩍 들어야 하는 ‘육체노동’, 그리고 잘나가는 스타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내줄 듯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정신적 회의감까지, 반 농담으로 잡지사의 패션 에디터는 ‘3D 업종’이라고 말할 정도다.
과장도 더러 있지만 이 소설은 현실과의 공통점도 꽤 갖고 있다. 냉혈인간 같은 편집장 미란다도 패션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패션지의 편집장이라면 패션 산업 전반을 부흥시키고 소비자들의 취향을 이끌 줄 아는 책임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옷이 잘 팔리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패션이라는 ‘별천지’의 매력에서 소소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할 일이다. 결국 ‘악마’도 멋진 편집장이다. 프라다도, 이 책도 날개돋친 듯 팔리게 만들고 있으니.
〈엘르〉 패션 디렉터, 사진 20세기 폭스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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