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연 패션 어드벤처
5년 전 이맘때, 나는 뉴욕에 있었다. 다음 시즌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뉴욕 패션 위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9월 11일 아침이었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미국인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뉴스 들었어요? 세계무역센터에 무슨 경비행기 같은 게 부딪힌 모양이던데….” 작은 항공 사고라도 난 것이려니 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도, “오늘 다운타운 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사고 때문에 완전 교통이 난리가 났대요.”
‘바쁘게 다녀야 하는 날에 하필 이런 일이 터질 게 뭐람.’ 반대편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던 그 순간, 이미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첫 번째 비행기가 꽂혔고 곧이어 남쪽 타워에도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다. 오전 9시30분, 미국 국방부 건물에 폭발이 발생했을 때, 나는 뉴욕 패션쇼가 열리는 22번가의 브라이언트 파크에 막 도착했다.
오전 일찍인데도 프레스룸은 각국 패션 기자들과 바이어들로 붐볐다. 오전 10시. 정신없이 휴대폰으로 쇼 초청장에 대한 확인 전화를 하고 있는데 프레스룸에 켜져 있던 대형 티브이 화면에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잡혔다. “아니, 누가 영화를 틀어 놓은 거야!” 누군가 소리쳤다. 영화? 어떤 사람들은 티브이 생중계를 영화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면서 볼륨을 높여보라고 소리쳤다.
“오, 마이 갓!”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던 어떤 여자가 경악하듯 울먹이며 소리쳤다. “지금 남동생이 세계무역센터 앞에 있는데 빌딩이 무너져서 길거리에 팔과 다리가 굴러다닌대요!”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화면이 영화가 아님을 깨달았다. 순간 어디선가 굳은 표정의 안전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모든 쇼는 중지입니다. 돌아가시오!” 프레스룸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밖으로 뛰쳐나오니 거리에 다니던 차들은 어느새 거의 자취를 감추고, 버스에는 ‘서비스 중단’ 표지가 붙어 있었다. 걷는 수밖에 없었다. 다운타운 쪽으로 방향을 트니, 반대편 지평선에 보여야 할 세계무역센터의 꼭지는 간데없고 검은 연기만 자욱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현실일까 싶었다. 뉴욕 땅에 머문 지는 일평생 통틀어 보름도 채 안 되었지만 이 순간 나는 어느 뉴요커와도 똑같은 심정으로 두렵고 슬펐다.
9월 11일, 미국에서는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날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목숨을 잃었거나 아직도 잃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때를 잊지 못한 채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이 그 깊은 상처를 잊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걸까. 패션잡지 〈보그〉 이탈리아판 9월호는 ‘스테이트 오브 이머전시’ (State of Emergency, 사진)라는, 테러를 소재로 한 패션 화보를 실었다. 최고급 브랜드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경찰의 강압 신문을 받는 장면이나 완벽한 메이크업을 한 모델이 총을 들고 테러 진압에 나선 장면들을 연출했다. 이 화보가 아무리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세계의 경찰인 양 행세하는 미국을 풍자(!)했다 쳐도, 5년 전 그 검은 연기를 두 눈으로 직접 봤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6·25 전쟁을, 광주 사태를, 그리고 ‘군위안부’ 할머니들을 ‘패션 화보’에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패션 화보의 역할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독자들로 하여금 보는 즐거움과 함께 건전한 소비 행위를 도모하는 안내자와도 같은 것이다. 이번 달 〈보그〉 이탈리아는 분명 그 선을 넘었다.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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