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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못지않은 승부 이상의 세계
지난 7월29일.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장마, 여전한 장대비 속에 4만의 관중이 광안리 백사장에 모여들었다. 하늘의 별은 비구름에게 먹힌 지 오래. 하지만 그 바닷가엔 지상의 별들이 있었다. ‘황제’라는 칭호의 프로게이머 임요환과 ‘앙팡 테리블’이라 불리는 신예 염보성. 요란한 관중의 함성과 호들갑스러운 사회자의 소개도 잠시. 머지않아 두 소년 전사는 방탄유리의 침묵 속으로 들어갔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종간 삼아 힘차게 날아올랐다. 탱크의 포격, 마법사의 뇌우, 야수의 독침이 난무하는 한여름 밤의 불꽃놀이. ‘스카이 프로리그 2006’의 전기리그 결승이었다.
“언제 적 스타크래프트인데 아직도 아우성이냐?” 정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스타크래프트의 시대는 갔다’는 말은 4, 5년 전부터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지난 두 해 동안 10만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던 광안리 대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올해의 실적에 실망을 표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도 내겐 그 결승전 중계를 놓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구경꾼들은 생활의 전장에서는 도망 다니기 일쑤이지만, 모니터 속의 승부에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졸일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미식축구 슈퍼볼과 윔블던 테니스 결승은 물론, 호주에서 가장 잘 달리는 개와 아프리카에서 가장 힘센 남자를 뽑는 게임까지 열렬히 관전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스타크래프트 중계만큼 꾸준히 나의 피를 끓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스타크래프트는 10년이나 묵은 구닥다리이지만, 최고 수준의 게이머들에 의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게임이 되었다. 전략형과 물량형의 대결이 벌어지면 그 둘을 아우르는 완성형 게이머가 등장하고, 그 완성을 밑에서부터 허무는 타 종족의 반란이 뒤따른다. 세 종족의 교묘한 삼각형은 날카로운 모서리로 팬들의 심장을 찌르며 무한히 전진한다. 열렬한 팬들은 관중석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포스터는 ‘폭풍 저그’ ‘악마 토스’ 같은 게이머들의 별명을 캐릭터로 승화시킨다. ‘퉁-퉁- 퉁퉁포-’ 하며 인터넷에 힙합 리믹스 버전이 올라와 있는 전용준 앵커의 격렬한 멘트와 김도형과 엄재경의 어긋난 해설이 주는 자유로움도 다른 스포츠 중계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다. 김창선 해설의 냉정한 칼질, 김정민 해설의 유연한 흥분, 그리고 문화방송 게임 해설진들 각각이 보여주는 독특한 해석은 게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10년 역사의 게임을 수천 년의 바둑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러나 다섯 살 때부터 바둑 속에 살면서도 현자의 지혜를 토해내는 기사들처럼, 스타크래프트의 게이머들도 머지않아 심오한 전투 속에서 발견한 삶의 비밀을 전해줄 날이 올 것이다. 매일 밤 그 앳된 소년들을 전장으로 뛰어들게 하는 메커니즘은 잔인하다. 그러나 진정한 게이머와 현명한 구경꾼은 모니터 속에 갇힌 전쟁 속에서 동물적인 승부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명석/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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