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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술자리에서 안방으로 ‘인간짝짓기’의 창조적 진화

등록 2006-07-26 19:46

지금은 방송중
2월 중순 입사 동기들과 술자리에서 마누라를 흉보기 시작했다. 모두 집에 가기 싫고, 새로운 로맨스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코끼리의 일생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본 코끼리의 성생활과 짝짓기 형태를 이야기하며 킬킬거리다가 부러워했다. 며칠 뒤 팀장에게 ‘일부일처-인간 짝짓기의 진화’라는 프로그램을 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재미는 있겠다”, “그런데 왜 하지?”, “뭘 얘기하지?” 사실 이 정도면 성사된 거나 다름없다. 재미와 의미 중 하나는 확보한다는 거 아닌가.

사전구성안을 만들어놓고 보니 취재와 촬영 방향이 크게 4가지로 정해졌다.

첫째가 외국의 진화론 연구자들 인터뷰. 국내에서는 최재천, 박순영 교수 외에는 이렇다 할 연구자가 없어 주로 국외 인터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들의 이론을 정확하고 쉽게 끌어내느냐가 관건이다. 둘째, 다양한 사례(일부다처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나 정자은행, 싱글 맘 등) 취재. 이때는 섭외가 가장 중요하고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지가 연출의 핵심이다. 취재원의 이야기 흐름을 끊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준비된 질문보다 즉흥적인 문답을 많이 구사한다. 셋째, 실험 재현. 독창적인 실험을 해볼 수도 있지만 전문 연구팀과 함께 하지 않으면 어려움이 많다. 선행 연구자들의 방법론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재연과 이미지 촬영. 과정을 재구성하거나 문제제기를 위해, 또 장면을 연결하려고 주로 사용한다. 이제 다큐멘터리에서 재연은 ‘된다, 안 된다’의 문제를 벗어나 정교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세련된 연출을 하느냐의 문제가 됐다.

촬영은 3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거의 위 순서대로 진행됐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빠뜨렸다. 바로 돈이다. 제작비를 마음껏, 시간을 무한정 쓰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돈 때문에 몇 가지 장면을 포기해야 할 때, 미련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편집 귀신이 될 것인가, 편집실 귀신이 될 것인가? 시사교양국 피디들 사이에 구전되는 말이다. 시간에 쫓기거나 편집 흐름을 타며 며칠씩 밤을 새다 보면 귀신도 울고 갈 만한 몰골이 된다. 다큐멘터리에서 편집은 재창조 정도가 아닌, 천지창조 과정이다. 처음 구상했던 것과 실제로 촬영된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더 나아가서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의 말처럼 나도 항상 편집기 앞에 앉아 첫 컷을 붙일 때면 처음 프로그램을 만들 때처럼 늘 막막하고 설렌다.

1차 편집이 끝나면 작가와 함께 시간 길이와 대본을 생각하며 정교한 편집(흔히 ‘파인 커팅’이라 한다)을 하고 작곡가와 상의해 음악을 만들고, 성우의 내레이션을 첨가하고, 기술 스태프와 비디오, 오디오, 화면효과, 자막 등을 같이 작업한다. 비록 많은 시청자가 봐주지 않더라도 한편의 프로그램에는 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노력과 시간이 투여된다.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는 순간, 안방에서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 가장 부끄럽고 두렵다.

허태정 / 〈MBC 스페셜〉 ‘일부일처-인간 짝짓기의 진화’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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