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음험한 기운이 안개처럼 자욱하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서울 강남의 한 라이브클럽에서 ‘그 녀석’을 처음 봤다. ‘껌’이라는 하찮은 이름의 펑크 밴드의 어린 리더였던 그는 열정적인 공연을 막 끝낸 직후였고 숨을 몰아쉬며 백스테이지에서 나와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탄가스 한 통은 들이마신 듯 풀린 눈동자와 무성의한 말투는 아직도 생생하다. 난 녀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 이 녀석은 그냥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그 아이의 이름은 이용원. 우리나라 펑크록 역사에서 ‘노브레인’과 ‘크라잉넛’만큼의 지분을 갖고 있는 인물인 그가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이용원이 펑크로커의 험난한 인생사를 시작한 때가 1997년, 무려 중학생이었을 때다. ‘중딩’답게 껌이라는 이름의 3인조 멜로딕 펑크 밴드를 결성하고, 한국 인디록 역사의 사관학교인 라이브클럽 드럭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연주했다. 몇 년 후, 극적인 전환점이 찾아온다. 2002년 일본의 메이저 레이블인 토이즈 팩토리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사실 워낙 그들의 음악적 지향점이 ‘하이스탠더드’를 위시한 일본의 멜로디 펑크록이긴 했다.
그들은 팀 이름을 살짝 고친다. ‘우리의 음악을 당신들 마음대로 씹어 달라’는 뜻에서 출발한 중딩들의 패기 넘치는 이름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껌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뒤에 ‘엑스’(X)를 붙여서 ‘검엑스’(GUMX)가 된 것이다.
2003년. 드디어 대망의 일본 메이저 데뷔 음반이 나왔고 바로 후지록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3집 음반 ‘올드’가 나오자 그들의 이름조차 모르던 우리나라의 평론가들조차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잘 달리고 겁이 없으면서도 여유로워졌다. 내가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불필요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들의 반가운 변화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음반을 끝으로 검엑스는 활동을 중단하고 리더 이용원은 새로운 팀을 결성했다. ‘옐로우 몬스터즈’. ‘마이 앤트 메리’의 베이시스트 한진영, ‘델리 스파이스’의 드러머 최재혁과 함께. 국내 인디계의 실력파 세 명이 모인 만큼 록팬들의 기대감이 엄청났는데, 기대를 훌쩍 넘어버렸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데뷔 음반을 들었던 때를 기억한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 멍하니 음악을 듣던 나에게 이용원은 외치는 듯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나 이용원이야.’
이 음반 중에서 ‘레이트’(Late)는 꼭 들어보길. 두 번 들으시길.
이 후에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멋진 음반과 돈 아깝지 않은 공연들을 팬들에게 선사하던 옐로우 몬스터즈는 얼마 전에 활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용원은 솔로 음반을 들고 나타났다. 바로 며칠 전에. 나는 걱정 않고 편한 마음으로 음반을 플레이시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딱 한 번 듣고 이 글을 쓴다.
훗. 걱정 안 하길 잘했지. 이용원은 이용원이다. 나이가 들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미친 듯이 달리고, 심지어 애교마저 늘었다. 이 음반에는 두 아이의 이름을 딴 ‘디 케이 디 제이’(DKDJ)라는 사랑스러운 곡도 있다. 노래 중간에 아이들 목소리도 등장하는데 박학기와 딸들이 함께 부른 ‘비타민’의 펑크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나이가 들면 꼰대 기질이 나오기 쉽다. 왜 그럴까? 인간이란 육체적인 능력이 떨어지면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경계하고 자신을 방어하려는 본능이 있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말자.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멋진 펑크로커의 새 음반을 들으면서 늙어도 꼰대가 되지 않는 좋은 예를 발견한 것 같아 무척 기쁘다. 2월에 받은 최고 멋진 선물이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