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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조심하라, 이들이 불러일으킬 지독한 감상을

등록 2016-09-09 15:37수정 2016-09-09 19:27

[토요판]이재익의 인디밴드 열전
도시, 꿈, 애수의 주인공 캐스커
2005년 가을. 새 프로그램을 맡은 나는 보통 때보다 훨씬 더 의욕에 차 있었다. 프로그램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에스비에스(SBS) 라디오의 유서 깊은 영화음악 프로그램인 <씨네타운>. 무슨 이유에선지 몇 년 동안 폐지되었던 그 프로그램을 다시 살리는 임무를 맡았고, 공들여 섭외한 디제이는 영화배우 심혜진이었다.

새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시그널 음악과 로고 음악이다. 사춘기 시절 나의 여신이었던 배우를 디제이로 섭외한 만큼, 그녀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에 딱 맞는 음악을 찾아 헤맸다. 시그널은 멀리 스페인까지 손을 뻗어 마음에 드는 음악을 찾아냈는데, 로고 음악을 만들어줄 우리나라 아티스트가 영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품고 싶었던 정서와 이미지는 대략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도시. 꿈. 애수. 이런 것들을 모두 품고 있는 음악을 찾다 찾다 발견한 신인 아티스트가 바로, 오늘 칼럼의 주인공 ‘캐스커’다.

캐스커는 기타리스트 이준오가 만든 일렉트로니카 팀이다. 2003년 첫 음반 <철갑혹성>을 발표할 때만 해도 이준오의 1인 밴드였으나 곧 보컬리스트 융진을 영입해 2005년 2집 <스카이랩>을 발표했고 그 후로는 둘이 함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막 2집 음반을 발표했을 때였고 당연히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뮤지션이었다. 그들은 로고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결과물 역시 대만족이었다. 꼭 그 인연 때문이 아니라 나는 그들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런데 데뷔 직후부터 그들 앞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일단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비트와 멜로디를 직조해내는 일렉트로니카라는 장르가 국내에는 낯설게 받아들여졌고, 그나마 이 장르를 좋아하던 팬들에게는 이미 ‘클래지콰이 프로젝트'라는 팀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 팬들의 감미로운 도시남자 알렉스와 지적인 면과 섹시한 매력을 동시에 뽐내는 호란이 듀엣으로 있는 클래지콰이에 맞서기에 ‘캐스터'라는 팀의 스타성은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인기의 온도와 음악적 성취는 비례하지 않는다. 인디밴드가 아닌 연예인으로서 클래지콰이가 지명도를 쌓아가는 동안, 캐스커는 오직 자신만의 음악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물론 클래지콰이에도 고수 중의 고수 클래지가 든든하게 음악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팬들의 스펙트럼이 넓을수록 창작자의 선택은 제한되기 마련이다.

캐스커의 본격적인 데뷔 음반이라고 할 만한 2집은 실로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 싱글 ‘고양이와 나’에서 담아낸 소녀적인 감성과 ‘다시 내게’의 세련됨, 연주곡 ‘어느 날’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애잔함까지. 탱고, 보사노바의 입김도 곳곳에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 국내에 일렉트로니카/라운지 장르가 막 자리를 잡던 그 무렵, 이 앨범은 어떤 방향과 기준점을 제시했다.

그 후 캐스커는 거의 매년 질적, 양적으로 꽉 찬 음반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인가. 음악을 듣는 방식이 음반에서 음원으로 급격하게 바뀌면서 기존 가수들도 음반 대신 싱글, 혹은 미니음반을 발표하며 몸을 사리던 변혁기였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필두로 수많은 걸그룹이 쏟아져 나오던 걸그룹 전성시대였다. 걸그룹도, 음원 위주의 뮤지션도 아니었지만 캐스커는 흔들리지 않고 음악을 발표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무려 정규 음반만 6장이다.

이 칼럼에서 누누이 뮤지션의 성실함을 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뮤지션을 평가하는 데 성실함이 가장 중요한 잣대는 아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그저 그런 음악은 공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을, 감정을, 때로는 지적인 각성을 일깨우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다. 캐스커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애썼고 덕분에 나는 근사한 프로그램 로고를 얻었고, 나를 비롯한 많은 도시인들은 위로와 공감을 선물받았고, 우리 가요계는 일렉트로니카 장르의 대표선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온다. 2012년 이후 몇 년 동안 캐스커는 정규 음반을 발표하지 않았다. 내심 걱정했으나, 작년에 발표한 미니음반을 들어보면서 안심했다. 캐스커는 아직 살아있었다. 십수년 전 어느 젊은 피디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 개의 키워드도 여전히 그들의 음악 속에 녹아 있다. 도시, 꿈, 애수. 이제 와서 말해주고 싶다. 고맙다고. 계속 노래해 달라고.

캐스커 입문용으로 적당한 추천곡은 2집의 ‘고양이와 나’, 그리고 5집의 ‘꼭 이만큼만’. 귀를 기울여 특별한 감각을 느끼고 싶다면 ‘산’을 추천하는데, 다만 조심하라. 이 노래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독한 감상을. 안나푸르나 산의 빙벽에 서서 마치 남의 일처럼 아득한 내 사랑의 눈사태를 목격하는 기분이랄까.

하아. 히말라야 산맥은 근처에도 가본 적 없으면서 이런 얘길 잘도 한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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