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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뚝심의 사자머리, 쌍팔년도 헤비메탈 그 자체

등록 2016-03-31 19:03

이재익의 인디밴드 열전
피해의식
직업상 하루가 멀다 하고 뮤지션들을 만나지만 정작 이들과의 만남이 술자리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매니저와 함께 보는 자리는 간혹 있지만 가수와 직접 만나서, 그것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일은 일 년에 한 두 번이 될까? 그 중에서도 가장 즐거웠던, 어쩌면 평생 다시없을 즐거운 추억을 만든 밴드가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인터넷 헤비메탈동호회에서 보컬 크로커다일(최일환)과 기타리스트 손경호가 만나 결성됐다. 이후 베이스를 치는 스콜피온을 영입하고 작년에 첫 정규음반을 발표했다. 이들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헤비메탈이다. 헤비메탈의 영향을 받은 음악도 아니고 헤비메탈을 21세기 식으로 재해석한 음악도 아니다. 수십 년 전에 멸종된 줄 알았던 바로 그 옛날 헤비메탈을 다시 살려냈다는 말씀. 음악뿐만이 아니다. 의상과 머리까지 머틀리 크루, 라우드니스, 포이즌 등등 추억의 쌍팔년도 헤비메탈 밴드들의 요란한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가죽바지와 호피무늬 조끼, 숫사자가 울고 갈만큼 부풀어 올린 긴 파마머리, 수염자국을 뒤덮을 정도로 짙은 화장. 아주 제대로다.

아마 중고등학생 시절 록음악 좀 들었다는 40대 아저씨들이이라면 이들을 보는 순간 이들의 음악을 듣는 순간, 대책 없는 향수에 젖어버릴 것이다. 시디(CD)가 발명되기도 전이었던 그때, 정품 엘피(LP)판 살 돈이 없어서 해적판을 구하러 청계천과 명동을 쏘다니던 기억, 야한 잡지를 사려고 세운상가를 어슬렁거리던 기억, 메탈리카를 들으며 머리를 흔들던 기억이 안개처럼 몰려들 것이라 장담한다.

그러나 피해의식은 이런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억팔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무릇 제대로 된 로커라면 응당 그래야 하듯이 이들은 20대 여성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마케팅 차원에서 잘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의 언사나 무대 매너를 보고 있노라면 분명히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고 예쁜 여자들은 헤비메탈이라면 질색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들의 뚝심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정규음반의 타이틀이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헤비메탈이 돌아왔다’ (Heavy Metal Is Back). 돌아온 헤비메탈 전사들이 반가웠던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이들은 국내 주요 록페스티벌에 서면서 이름을 알려나갔고 미국 최대 음악축제로 꼽히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outh By Southwest) 무대에도 섰다. 심지어 지난해 <슈퍼스타 케이(K)>(<엠넷> 오디션 프로그램)에까지 출연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필자가 이들을 만났던 때가 그 즈음이었다. 피디와 출연자로 만났지만 헤비메탈을 여자만큼 사랑한다는 공통점 하나로 술자리를 약속했고, 공수표로 끝나기 마련인 이런 식의 약속들과 달리 우리는 정말로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한국 헤비메탈의 산 증인인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 형님이 함께 자리해주셨다. 우리가 갔던 술집은 작은 무대와 악기, 앰프 등이 갖춰져 있어 간단한 공연이 가능했는데, 술에 취한 우리는 즉석에서 함께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깊어가는 여름밤,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 사랑스러운 메탈밴드가 오래오래 활동할 수 있기를.

피해의식의 소속사인 러브락컴퍼니의 기명신 대표가 지난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방송국 피디(PD) 생활을 15년 넘게 하는 동안 내가 처음으로 본,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만 하는 기획사 대표’였다. 홍대 인디밴드들의 착하디착한 형 노릇을 해왔던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평소 그의 인생 모토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인생은 사랑과 로큰롤이 전부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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