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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분노의 에너지를 충전하자

등록 2015-12-10 20:01

사진 트위터 갈무리
사진 트위터 갈무리
이재익의 인디밴드 열전
이스턴 사이드킥
사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이 그룹을 몰랐다. 매일 방송국 책상에 쌓이는 시디(CD)들 중에서 이들의 음반을 집어든 데에는 재킷 그림의 힘이 컸다. 강렬한 색으로 그려낸, 잔뜩 화가 나있는 사내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들을 테면 들어봐. 단, 내가 몹시 화가 나 있다는 사실만 알아둬.”

시적인 동시에 매우 직설적인 가사, 들썩이게 만드는 리듬, 투박하면서도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 완벽에 가까운 녹음 상태까지, 대단한 록의 향연을 듣고 두 가지를 직감했다. 1. 연말에 여기저기서 언급하게 될 ‘올해 최고의 앨범’으로 나는 이 앨범을 꼽겠구나. 2. 이 친구들 뜨겠구나.

고한결(기타), 박근창(드럼), 오주환(보컬), 배상환(베이스), 류인혁(기타). 다섯 사내의 데뷔 음반은 서툰 구석이 많았다. 의욕은 넘치는데 경험이 부족해 주먹만 휘두르는 신인 권투선수 같달까. 잘하는데 듣는 이를 녹다운시키기에는 펀치가 약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만에 그들은 핵주먹을 장착하고 링 위에 섰고 15년차 피디(PD)를 녹다운시켰다. 국카스텐과 갤러시 익스프레스의 뒤를 잇는 최강 인디 록밴드로 손색이 없다.

이들의 음악은 꽤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전형적인 개러지 록 사운드의 노래들도 많고 도시의 감성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노래들도 꽤 있다. 심지어 송창식과 산울림을 연상케 하는 한국적 정서도 지녔다. 그 중에서도 나는 새 앨범의 ‘장사’라는 노래에 주목한다. 이 곡은 일상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노래한다.

“장사는 망해간다. 내가 팔이요 발이요 다리요 버둥대는 밤이요. 사는 게 망해간다. 계속 걸어도 무릎은 나가고 기름값은 오르네. 도시들은 앞을 보고, 우리들은 너를 보고, 내 식구는 나를 보고, 엉엉엉 우네.”

강렬한 록사운드에 실린 노랫말은 장사와 하등 관계가 없는 나에게까지 망한 자영업자의 처절한 심정을 심어놓았다. 분노를 전이시키는 방식도 멋지다. 설교도 하지 않고 혁명가인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신나게 노래할 뿐이다. 듣고 있노라면 이상하리만치 흥분될 뿐. 그래, 이 노래는 굿판이다. 시대의 분노를 징과 꽹과리 삼아 신나게 놀아보는 굿판.

요즘 가요계에는 분노의 감정을 노래하는 가수가 별로 없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1970~80년대 포크록 이후 꾸준히 이어져오던 분노의 목소리가 언젠가부터 뚝 끊겼다. 다들 사랑타령이다. 록그룹들도 마찬가지. 난해한 정신세계를 노래할지언정 시대의 분노를 제대로 노래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스턴 사이드킥의 음악, 특히 새 음반, 그 중에서도 ‘장사’는 소중하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를 받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관음전에서 막 나왔다는 뉴스가 떴다.

나 또한 폭력시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다른 노동자들을 대신해 분노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방법론에 있어 잘못된 부분은 수사기관이 가릴 테지만, 분노하고 행동하는 일 자체를 사회 전복 시도쯤으로 인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직장을 잃는 것도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린 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면 국가의 존재이유는 어디 있는가? 내가 먹고 살만 하다고 타인의 절망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공감은 하면서도 분노는 못한다면 우리가 지렁이와 다를 게 무언가?

이스턴 사이드킥을 듣고 분노의 에너지를 충전하자. 꿈틀거리지만 말고 제대로 분노하자.

여기까지만 쓰면 이들이 무슨 선동의 밴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노래들도 많다. 마지막으로 추천하는 노래 역시 도시적 감수성 충만한 ‘88’이라는 것이 함정.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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