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라는 세월은 어디에 갖다 붙여도 긴 세월이다. 20년의 결혼 생활, 20년차 직장인, 정치 인생 20년, 20년 째 한화 이글스 팬 등등 어느 분야에서건 아득한 감을 준다. 20년차 록밴드라면? 어휴. 젊음과 혈기가 속성인 록밴드로서 20년차는 40년차 발라드 가수라고 할 만하다. 하물며 인디 록밴드라니.
오늘은 한국 인디밴드의 시조새 3호선 버터플라이, 그 중에서도 보컬 남상아를 소개한다. 이들은 아직 데뷔 20주년까지는 몇 년 남았지만 보컬 남상아가 또 다른 인디밴드로 데뷔한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3호선 버터플라이를 말하려면 먼저 허클베리 핀 1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8일의 수요일>이라는 타이틀의 이 음반은 한국대중음악의 명반 대열에 종종 꼽히는 음악적 성취를 달성한 동시에 우리에게 남상아라는 걸출한 여성 로커를 선물한 음반이기도 하다. 이 음반이 없었다면 ‘3호선 버터플라이’도 없었을 터.
남상아는 개인적으로도 묘한 인연으로 얽혀있다. 오래 전, 내 등단작이기도 한 장편 소설 <질주질주질주>가 영화 <질주>로 만들어지면서 나는 감독과 함께 합숙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원작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여주인공은 인디밴드 로커였다. 어느 날 감독이 허클베리 핀 1집을 들고 오더니 여주인공으로 남상아를 추천했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내가 그린 여주인공은 야성미와 섹시함이 넘치는 글래머러스한 이미지였는데 남상아의 비주얼은 음…. 상당히 중성적이고 어두웠다. 남자 캐스팅을 당대의 꽃미남 스타들로 하는 대신 여주인공만큼은 ‘진짜’ 인디 로커로 하고 싶다는 감독의 의견에 물러서긴 했지만, 촬영 내내 나는 여주인공 캐스팅이 불만이었다.
지금에야 고백하건데 나는 그가 ‘진짜’라는 사실을 질투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하필 나와 같은 대학교 학생이었고 하필 그때 나도 록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록밴드라고 말하기도 창피하다. 나는 그저 겉멋에 음악을 했다. 당시 나는 20대 초반에 등단을 하고 공모전 상금으로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재수 없는 서울대생이었다. 게다가 내가 쓴 소설이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기고만장. 돌이켜보면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무명의 인디로커 남상아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한눈에 그가 ‘진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니까. 동시에 내가 가짜라는,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직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 경계는 고민의 깊이에 있다. 자아와 세상에 관한 그의 고민은 처절하도록 깊었다. 나는 고민하는 척만 했다. 괴로운 척, 혼란스러운 척, 분노한 척. 진짜 로커인 그녀를 만난 후 나는 더 이상 기타를 잡지 않았다. 더 이상 고민하는 척 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 뒤로 내가 계속 영화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고 방송국 피디가 되어 팔자 좋게 사는 동안 그녀는 무려 20년의 세월을 록음악을 위해 바쳤다.
첫 음반 발표 후 허클베리 핀을 나온 남상아가 성기완을 만나 3호선 버터플라이를 결성하는 순간은 우리나라 인디밴드 역사에서 반드시 기록될 순간이다. 불문학 박사 출신에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성기완과의 만남은 환상적인 결과물로 이어지고 있다. 20대의 그가 보여준 끓어 넘치는 분노와 서늘한 절망은 폭 넓은 몽환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이런 변화 역시 가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는 늘 진짜로 노래해왔다.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캐스팅을 반대했던 나는 이제 와서야 그에게 말하고 싶다. “누나, 섹시해요.”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