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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만들어진 투견

등록 2015-09-18 19:56수정 2015-10-26 17:13

[토요판] 박정윤의 동병상련
오래전 일이다. 한 동물병원에서 일할 때 만난 한 핏불은 투견이었다. 얼굴은 흉터투성이고 귀와 목덜미에 심하게 상처가 있었다. 보호자는 다친 귀를 아예 잘라달라고 했다. 다른 개에게 물어뜯기지 않게 아예 싹둑 잘라달라고. 한술 더 떠서 자기가 사람이 좋아서 이렇게 병원에 치료하러 데리고 오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다고 큰소리였다. 천만원을 넘게 주고 사왔는데 애가 싸움을 못한다고 원장에게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을 써서 성격을 바꿔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 개는 정말 착했다. 입원해 있는 며칠간 그 개는 정말 행복해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편안해했다. 퇴원하는 날 보호자는 요크셔테리어를 안고 와서 미용과 다른 진료를 봤다. 나에게 자기는 강아지를 너무 좋아해서 요 녀석(요크셔테리어)에게 꼼짝도 못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한손에 요크셔테리어를 안은 채 핏불을 질질 끌고 나갔다. 그 핏불은 우리를 몇번이고 돌아보며 끌려갔다. 퇴원한 날 저녁 나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엉엉 울었다. “차라리 그 개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얼마 전 방영된 <티브이 동물농장>의 투견 관련 방송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투견도박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검거되어 기사로 다뤄진 게 세 건이다. 이번 방송 이전에도 매년 수차례의 투견도박 현장이 적발됐지만 이슈가 되지 못했다.

투견은 도박을 위해 동물을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학대하는 범죄행위이며 ‘동물보호법 제8조 2항 3. 도박, 광고, 오락, 유흥 등의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에 의거해 엄격히 금지된 행위다. 하지만 투견도박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가벼운 벌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번 방송에서 덮친 현장에서도 싸움을 하다 다친 개들을 제외하고 케이지에 갇혀 있던 다른 개들은 소유권 문제로 구조되지 못했다.

그 뒤 투견에 관한 기사가 몇몇 나왔는데, 어떤 투견이 잘 싸우느냐는 내용도 실렸다. 한마디로 ‘어이 상실’이었다. 로트와일러, 핏불테리어, 도사견 등 여러 품종이 거론되면서 그들의 위험성이나 강인함에 대해 떠들었다. 한쪽에서는 피 흘리는 투견을 보면서 경악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투견의 용맹 순위를 올리고 있다니. 그만큼 다른 세상 이야기로 보는 것은 아닐까.

집에서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조차도 투견은 다른 세상의 개라고 생각한다. 나와 동떨어진 세계의 개, 불쌍하지만 가까이하기 힘든 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 투견용으로 키워지는 개들이 많다. 시골에서 커다란 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경우 대부분의 용도는 식용 아니면 투견으로 팔기 위해서다. 꼭 투견농장에서만 키워지는 게 아니고 강남 한복판에서 예쁜 몰티즈를 키우는 사람들도 그들의 재미를 위해 투견을 키운다는 사실을 대부분은 생각하지 못한다.

투견은 없다. 투견을 만든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투견이 될 수도 있고 반려견이 될 수도 있다. 투견, 쇼도그, 식용견…. 용도별로 개들을 구분하고 만들어낸 것은 우리들이다. 불쌍하다고만 한발짝 떨어져 동정할 일이 아니라 나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동물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바꾸어야 한다. 품종으로 성격을 단정짓고, 용도별로 개들을 분류하고, 순종·잡종으로 등급을 매기는 우리의 인식과 풍토가 투견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영화 <화이트 갓>을 보면 잡종견이라 버려진 하겐이 투견꾼에게 넘어가 괴물이 된다. 학대받으며 지내다가 탈출한 뒤 안락사 직전인 수백 마리의 유기견들과 함께 자신들을 학대한 사람들을 공격하며 분노와 복수로 폭주한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하겐의 원래 가족인 릴리와의 재회다.

박정윤 올리브동물병원장·<바보 똥개 뽀삐> 저자
박정윤 올리브동물병원장·<바보 똥개 뽀삐> 저자
방송에서 구조된 투견 출신의 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몸의 상처는 치유되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료받을 수 있을까. 영원히 치유되지 못한 채 평생을 갇혀 살 수도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다. 싸우고 죽여야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사랑받을 만하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끔찍한 존재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릴케의 말처럼.

박정윤 올리브동물병원장·<바보 똥개 뽀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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