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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묵향에 퍼진 사랑과 웃음

등록 2007-07-22 15:32

따뜻하고 정감어린 수묵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키재기-꿈꾸기’와
따뜻하고 정감어린 수묵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키재기-꿈꾸기’와
교과서 미술기행 / [난이도 = 고등]

함께 꿈꾸는 세상이 주는 묵향 가득한 기쁨

김호석의 ‘어때, 시원하지!’와 ‘키재기 - 꿈꾸기’

김호석의 그림이 따뜻해졌다. 어두운 숲길에서 만난 불빛처럼 반갑다. 예전 그의 붓이 대나무의 푸른 기상을 드러냈다면 요즘 만나는 그림에서는 맑은 시냇물 소리가 흐른다. 지난 시절, 그의 그림은 역사의 복판에 당당히 선 전사의 얼굴이었다.

내가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난 것은 김남주 시인의 시집 ‘솔직히 말하자’였다. 갓 출소한 김남주 시인의 형형한 모습을 전면에 담은 표지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가시덤불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냄새가 느껴졌다. 그리고 몇 년 후 시인은 처연히 세상을 떠났다. 시인을 죽인 폭압의 시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팽팽한 활시위 같던 그의 그림이 부드러운 여유를 허용한 것은 일상의 고요한 움직임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정결한 먹선이 강인함을 그리기 위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따뜻함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 지난 시절 추구하던 이상이나 가치와 부합하고 있는지, 혹 너무 멀리 벗어나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우리는 안다. 잃어버린 것만큼 새롭게 발견한 삶의 표정이 우리를 깊이 있게 가꾸어주고 있음을. 갈등과 대립, 반목과 불신을 뛰어넘는 힘은 세상을 향한 평화로운 시선에서 시작된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기억이 존재하는 자리마다 희망은 갓난아기의 배냇 웃음처럼 우리를 감동시킬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인간의 역사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소박한 행복은 작은 불안에도 쉽게 균열이 간다. 그런 불안이 우리를 냉소와 무기력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해맑은 웃음과 용기를 주는 불빛이 있어 우리는 오늘도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 풍경을 그리워한다.

사랑은 관심이다. 자신을 오롯이 기울여 상대의 마음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심한 관찰도 사랑의 영역이다. 폭우 속에서 살아남은 풀들이 봄빛의 보살핌을 기억하듯이, 현실을 꿋꿋하게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역시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세혈관을 흐르고 있는 어린 날 누렸던 평화와 기쁨의 원체험이다.


‘어때, 시원하지’ 그림에는 어린날 누렸던 평화와 기쁨의 기억이 녹아 있다.
‘어때, 시원하지’ 그림에는 어린날 누렸던 평화와 기쁨의 기억이 녹아 있다.
엄마는 딸의 귀를 조심스레 파주며 한마디 한다. “아이고, 우리 딸내미 귀지가 이렇게 꽉 차 있어서 그동안 엄마 말 안 들었구나. 어쩐지 우리 예쁜 딸이 엄마한테 심통을 부리더라. 이 나쁜 귀지!” 그 작은 귓구멍을 샅샅이 살피느라 엄마는 심각하다. “아야, 엄마 아프잖아. 그만해.” 귀를 열심히 잡아당기는 엄마와 실랑이하는 어린 딸의 한때가 우리 가슴에 흐뭇한 웃음으로 번진다. 이 그림이 바로 ‘어때, 시원하지!’이다.

엄마는 어린 딸의 귀지를 파주며 살아가면서 진심으로 잘 듣는 일이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지 모른다. 여름 꽃 같은 딸들이 자라 세상의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무한한 사랑으로 길러내는 담백한 묵향의 시간. 이것이 화가 김호석이 믿는 생기 가득한 사람살이의 원형이다.

‘키재기 - 꿈꾸기’ 역시 보는 사람이 저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정답고 행복한 그림이다. 상처가 우리를 쓰러뜨리기 전의 시간, 친구와 싸워도 이내 화해가 가능했던 시간, 그 때 우리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기를 얼마나 꿈꾸었던가. 고만고만한 키를 서로 맞대며 조금이라도 더 커 보이려 목을 쭉 빼고 까치발을 드는 천진한 풍경 안에서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두 아이의 키를 재주는 할아버지도, 옆에서 지켜보는 누나들과 엄마도, 세발자전거를 타고 올려다보는 꼬마도 웃는다. 밝은 웃음소리가 둥근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간다. 아이들은 오늘도 놀이를 통해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을 익힌다. ‘키재기- 꿈꾸기’는 경쟁보다 공동체적인 협력을 이야기한다. 함께 꿈꾸는 세상이 주는 기쁨은 불신과 소외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현재를 이겨내게 한다.

김호석이 그려낸 우리 시대의 풍속화에는 어떤 순간에도 저버리지 않아야 할 사람에 대한 믿음이 어린 날 부르던 동요처럼 맑게 울린다. 그 나뭇잎 배를 타고 우리는 잃어버린 여백을 찾아간다. 수묵화처럼 서로에게 스미고 번지는 것. 여백이 끝없는 평화의 주제가 되는 시간. 그렇게 우리도 서로를 물들이며 살아간다.


정지원시인
정지원시인
여린 반딧불이의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커다란 들불의 시간을 기다리며 신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산다. 쨍쨍한 불볕과 소나기 속에서도 굳세게 자라나는 여름 꽃들. 봉숭아, 채송화, 나리꽃, 백일홍, 보랏빛 붓꽃, 햇빛이 닿으면 꽃잎을 펼치는 수련처럼 우리의 오늘에는 해사한 기쁨이 조롱조롱 맺혀있다.

정지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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