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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록 2007-11-18 16:50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
[난이도 수준-고2~고3]

일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와 ‘맨발의 톨스토이’

노래에도 저마다 애틋한 사연이 있듯이 그림에도 사연이 있다. 내게는 일리야 레핀의 그림이 그렇다. 편하게 볼 수 없는 싸하고 아린 시간들이 이 특별한 그림들 속에 번져있다.

레핀의 그림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는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한차례씩 홍역을 앓듯 날개를 접고 소시민화되면서 자신은 얼마나 혹독한 시간의 상처에 무너졌던가. 그 무채색의 힘겨운 무게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기에 더 외로웠던 우리들에게 그 여름은 얼마나 지치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가. 혁명은 레핀의 그림처럼 보상받을 수 없는 가난한 꿈에 불과할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꿈은 옳은 것을 확인하려는 과정 속에서 아주 아프게 자신을 변화시켰고, 그리고 세상을 조금씩 진보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하다. 설령 레핀의 그림처럼 아무도 기다려 준 사람이 없고, 다들 외면하고 침묵하려 한다 해도 변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핀의 그림 앞에서 말을 잃었던 순간이 아프게 떠오른다. 왜 모르겠는가. 다들 저 그림 속 상황을 온몸으로 살아왔는데…. 우리는 그림을 보며 수배와 고문, 감옥으로 이어지던,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80~90년대를 만났던 것이다. 아무리 혁명의 회의론이 거세게 밀려와도 놓칠 수 없는 깃발이 있어서 마파람 속에서도 찢겨진 깃발을 들고 버티고 서 있지 않았던가.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그저 우리도 그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된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삶들이 지나온 시간들을 함부로 능멸하고 모독하더라도 레핀의 그림 앞에 서 있던, 그 외롭고 진실한 자신과의 맹세를 잊지 않길 바란다. 이 그림을 함께 본 우리가 다시 길을 걸을 때 바람찬 눈밭 속에서도 조금 더 환하고 멀리 길을 낼 수 있도록.

혁명가의 슬픈 운명을 그린 일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혁명가의 슬픈 운명을 그린 일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혁명가에게 피하고 싶은 현재이다. 그가 수배를 피해 몰래 집에 돌아왔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가족들은 반가움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된다. 끝없는 압수와 수색, 협박과 감금, 미행 등 가족들은 이미 오랫동안 폭력의 피해자로 숨죽이며 살아와야 했다. 한때는 가족의 자랑이었던 가장 똑똑하고 어른스러웠던 대학생 오빠가 이제는 집안의 재앙을 몰고 온 장본인이다. 그의 사상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단지 이 집의 불안한 평화가 그의 등장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것이 끔찍할 뿐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어려울 때마다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이 그리웠다. 자신을 기다리는 식구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곳. 그 그리움의 힘으로 그는 숱한 고비를 힘겹게 싸워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집에 대한 상상은 혁명의 이상처럼 현실 앞에서 깨지고 말았다. 그는 무참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리고 곧 열린 문으로 다시 돌아서 나갈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아픈 사실을 깨닫고 그는 흰 눈밭에 붉은 피를 흘리며 싸우다죽어갈 것이다. 이것이 변절하지 않는 혁명가의 슬픈 운명이다.


생명욕으로 충만한 숲속에서 경건하게 서 있는 위대한 영혼을 그린 〈맨발의 톨스토이〉
생명욕으로 충만한 숲속에서 경건하게 서 있는 위대한 영혼을 그린 〈맨발의 톨스토이〉
‘맨발의 톨스토이’는 아침 숲을 산책하는 톨스토이를 그린 작품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숲 속에서 조용하고 경건하게 서 있는 한 위대한 영혼을 그린 이 그림은 진실하고 아름답다. 맨발로 편안하게 숲 속을 거닐고 있는 톨스토이. 그리고 그를 평생 존경한 화가 레핀. 빼곡히 들어찬 진초록 숲의 나무들은 그들이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초록빛이 주는 생명의 에너지와 톨스토이의 옷과 수염의 흰 색이 편안하고 고요한 사색의 아침 풍경과 잘 어울린다. 따뜻하고 선하고 드넓은 내면을 지닌 예술가의 아침 기도. 그 기도들은 분명 이 그림처럼 행복하고 풋풋할 것이다. 이 그림 속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동화들을 들려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반’ ‘사람에게는 얼마나 땅이 필요한가’ 이런 그의 동화를 듣고 있다보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사는 게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이반의 나라에서 살려면 손에 노동의 굳은살이 박혀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나라,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나라. 사랑과 평화와 나눔이 있는 나라. 톨스토이는 이런 세상을 꿈꾸었다. 평생을 걸어 끝까지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았기에 그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얼굴을 가졌다.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고, 길이 사라져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럽던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묻는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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