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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피동형 ‘이·히·리·기’ 탄생 비밀

등록 2008-01-27 16:21수정 2008-01-27 16:25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
[난이도 수준-중2~고1]

13. 품사의 세계 - 동사와 명사 ⑤
14. 능동과 피동 ①
15. 능동과 피동 ②

“수동태는 알겠는데 피동은 잘 모르겠어요.” 이게 우리 언어 교육의 현실이다. 영어 시간에 배우는 관사·전치사·관계대명사 같은 문법 용어들은 친숙한데, 한국어 문법에 나오는 관형사·피동사·사동사 같은 말들은 영 낯설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어인 한국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습득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한국어 능력이 외국어 학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자 모든 학문의 도구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어가 그렇다. 이렇게 중요한 한국어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영문법에 대한 지식을 뛰어넘는 한국어 문법 지식이 아주 중요하다. 오늘부터는 그 첫 단계로 피동에 대해 알아보자.

영어에서 수동태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어에서는 어떨까. 우리말에서 피동문을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동사(정확히는 타동사)의 어간에 ‘-아/어지다’를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글씨를 지우다’가 ‘글씨가 지워지다’가 되고 ‘불을 켜다’가 ‘불이 켜지다’가 된다. 이렇게 ‘-아/어지다’ 꼴로 된 것을 ‘피동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피동문을 만드는 데에는 이것보다 더 간편한 방법이 있다. 동사의 어간에 ‘이, 히, 리, 기’ 중의 하나를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는 ‘보이다’로, ‘먹다’는 ‘먹히다’로, ‘밀다’는 ‘밀리다’로, ‘안다’는 ‘안기다’로 탈바꿈을 한다. 이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 동사들을 위의 ‘피동형’과 구분해서 ‘피동사’라고 한다. 이 피동사들은 독립적인 낱말로서 국어사전에 당당히 표제어로 올라간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보자. 모든 동사에 ‘-아/어지다’를 붙이면 피동의 뜻을 표현할 수가 있는데, 왜 굳이 ‘이, 히, 리, 기’를 붙이는 복잡한(?) 방법을 생각해냈을까? 피동사를 버리고 모든 동사를 피동형으로만 쓰면 문법이 훨씬 단순해져서 어린이나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우기가 훨씬 쉬워질 텐데 말이다.

‘보아지다’와 ‘보이다’를 갖고 따져보자. 두 표현의 차이는 뭘까? 앞엣것에 비해 뒤엣것이 글자가 하나 적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글자가 적으니 소리내기가 더 쉽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말에서 피동사가 생겨난 것은 발음을 간단하게, 경제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똑같은 뜻을 표현하는 데 더 간편한 방법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쪽을 택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 시간도 절약되고 입도 덜 아프기 때문이다.


‘-아/어지’가 ‘이, 히, 리, 기’로 줄어든 것은 언어의 진화다. 언어에서 진화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경제성이다.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되도록 노력을 덜 들이려는 게 모든 인간 행동의 원리다. 이렇게 간편한 피동사 조어법은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우리말을 써서 의사소통을 해온 수많은 사람들이 편리성을 좇아서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말은 쉼 없이 달라지면서 진화한다. 우리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 진화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뛰어들어서 진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참여자들이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있는 일이 아닌 바에야 또렷한 정신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김철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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