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
[난이도 수준-중2~고1] 15. 능동과 피동2
16. 능동과 피동3
17. 능동과 피동4 우리말의 피동문은 피동형이나 피동사 중 하나를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쓰는 버릇이 널리 퍼졌다. 즉, ‘보이다’나 ‘보아지다’ 중 하나만 쓰면 충분한데도(물론 이때는 ‘보이다’가 낫다) ‘보여지다’로 쓰는 식이다. 여기서 ‘보여지다’가 왜 이중피동이냐고 묻는 독자가 있다면 자신의 분석 능력을 의심해야 한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이+어지다’라는 구성요소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글이나 말에서 이중피동을 쓴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잘 닦여진 도로’ ‘손바닥에 쓰여진 글씨’ ‘끈으로 묶여진 상자’ ‘과일이 담겨진 접시’ ‘영웅으로 불려진 사나이’ ‘책상 위에 놓여진 책’…. 방금 예로 든 동사들은 모두 피동사가 가능한 것으로, 각각 ‘닦인’ ‘쓰인’ ‘묶인’ ‘담긴’ ‘불린’ ‘놓인’ 따위로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눈에 덮여진 산봉우리’ ‘재료가 잘 섞여졌다’ ‘산더미같이 쌓여진 쓰레기’ ‘잘 읽혀지는 소설’ ‘굳게 잠겨져 있는 대문’ ‘손에 들려진 장난감’ ‘발길에 채이는 낙엽’…. 적어도 한국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들이 이중피동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의 ‘채이는’은 조금 헷갈려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차다’의 피동형이 ‘차이다’이고, 이걸 줄이면 ‘채다’가 된다. 그러니 ‘채이다’의 본디꼴을 밝혀 적으면 ‘차+이+이다’가 된다. ‘이’가 쓸데없이 한 번 더 들어간 것이다. 피동문과 관련해서 쉽게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습성은, 엄연히 피동사가 있는데도 피동형을 쓰는 경우다. ‘깊게 파진 구멍’ ‘배가 뒤집어졌다’ ‘정성이 모아지고 있다’ 같은 경우다. 이런 동사들은 피동사를 써서 ‘파인’ ‘뒤집혔다’ ‘모이고’로 표현해야 우리말답다. 이렇게 생각 없이 피동형을 쓰는 사람들은 피동사라는 고급한 한국어 구사 단계에 이르지 못한, 유아적 문법체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실제로 우리말을 익히는 과정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피동문을 표현한다). 흔히,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을 위해서는 되도록 피동 표현을 피하라는 말들을 한다. 그러면서 피동문이 영어의 수동태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인식의 오류가 숨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말에서도 피동사나 피동형을 써서 피동문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동 표현을 피하라’는 말은 위에서 설명한 이중피동을 피하라거나 ‘쓸데없는’ 피동 표현을 쓰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다. 지난 글에서 얘기했다시피,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어 사용자들은 피동형의 번거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피동사라는 간편한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이걸 다시 피동형으로 돌려서 쓰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는데, 피동사에다 다시 피동형을 붙여서 이중으로 피동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은 경제성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언어 행위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 자신의 손끝에서 생산되는 글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교양인의 당연한 도리다. 김철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난이도 수준-중2~고1] 15. 능동과 피동2
16. 능동과 피동3
17. 능동과 피동4 우리말의 피동문은 피동형이나 피동사 중 하나를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쓰는 버릇이 널리 퍼졌다. 즉, ‘보이다’나 ‘보아지다’ 중 하나만 쓰면 충분한데도(물론 이때는 ‘보이다’가 낫다) ‘보여지다’로 쓰는 식이다. 여기서 ‘보여지다’가 왜 이중피동이냐고 묻는 독자가 있다면 자신의 분석 능력을 의심해야 한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이+어지다’라는 구성요소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글이나 말에서 이중피동을 쓴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잘 닦여진 도로’ ‘손바닥에 쓰여진 글씨’ ‘끈으로 묶여진 상자’ ‘과일이 담겨진 접시’ ‘영웅으로 불려진 사나이’ ‘책상 위에 놓여진 책’…. 방금 예로 든 동사들은 모두 피동사가 가능한 것으로, 각각 ‘닦인’ ‘쓰인’ ‘묶인’ ‘담긴’ ‘불린’ ‘놓인’ 따위로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눈에 덮여진 산봉우리’ ‘재료가 잘 섞여졌다’ ‘산더미같이 쌓여진 쓰레기’ ‘잘 읽혀지는 소설’ ‘굳게 잠겨져 있는 대문’ ‘손에 들려진 장난감’ ‘발길에 채이는 낙엽’…. 적어도 한국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들이 이중피동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의 ‘채이는’은 조금 헷갈려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차다’의 피동형이 ‘차이다’이고, 이걸 줄이면 ‘채다’가 된다. 그러니 ‘채이다’의 본디꼴을 밝혀 적으면 ‘차+이+이다’가 된다. ‘이’가 쓸데없이 한 번 더 들어간 것이다. 피동문과 관련해서 쉽게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습성은, 엄연히 피동사가 있는데도 피동형을 쓰는 경우다. ‘깊게 파진 구멍’ ‘배가 뒤집어졌다’ ‘정성이 모아지고 있다’ 같은 경우다. 이런 동사들은 피동사를 써서 ‘파인’ ‘뒤집혔다’ ‘모이고’로 표현해야 우리말답다. 이렇게 생각 없이 피동형을 쓰는 사람들은 피동사라는 고급한 한국어 구사 단계에 이르지 못한, 유아적 문법체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실제로 우리말을 익히는 과정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피동문을 표현한다). 흔히,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을 위해서는 되도록 피동 표현을 피하라는 말들을 한다. 그러면서 피동문이 영어의 수동태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인식의 오류가 숨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말에서도 피동사나 피동형을 써서 피동문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동 표현을 피하라’는 말은 위에서 설명한 이중피동을 피하라거나 ‘쓸데없는’ 피동 표현을 쓰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다. 지난 글에서 얘기했다시피,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어 사용자들은 피동형의 번거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피동사라는 간편한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이걸 다시 피동형으로 돌려서 쓰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는데, 피동사에다 다시 피동형을 붙여서 이중으로 피동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은 경제성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언어 행위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 자신의 손끝에서 생산되는 글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교양인의 당연한 도리다. 김철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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