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
[김지훈_역사이야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본 우리사회 역사의 발전의 힘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해 주변에 감기 앓는 사람이 늘었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듯한 추위라 하여 이름 붙여진 ‘꽃샘추위’는 봄이 옴을 느낄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이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자연의 이치는 너무 당연하지만, 역사적으로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기 위한 몸부림은 치열했다.
2008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고 4월 9일 치를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당내 공천갈등, 비리의혹 문제로 나라가 다소 소란스럽다. 그렇다고 현재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 공론의 장 등으로 국민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와 통로는 늘어났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들은 ‘독재타도’, ‘민주수호’를 외치며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거리에 나서야 했다. ‘민중들의 피로 이룬 민주화’라고 불릴정도로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 등 당시 독재정권에 맞선 사람들의 희생은 대단했다.
민주화의 봄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가?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작품을 보면 1950년대 말 우리사회 정치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시골의 한 국민학교 5학년 2반이란 공간은 부정부패가 난무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절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모습이다. 급장인 ‘엄석대’란 인물을 중심으로 한, 반 내 권력관계는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엄석대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공부도 잘하고 통솔력 있는 ‘모범생’으로서 학교에서 평판이 좋다. 하지만 실제 그는 공부 잘하는 친구의 시험지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급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점심시간마다 마실 물을 떠 올 당번을 정해둔다거나, 돈과 물건을 빼앗는 ‘나쁜’인물이다. 여기에 서울에서 한병태가 전학 오면서 분위기는 반전 될 듯 했다. ‘진짜 모범생’인 한병태는 엄석대의 권위주의에 반항하며 여러가지 문제제기를 하지만, 친구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고자질쟁이라는 오명을 쓰고 담임교사와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그렇게 혼자 전전긍긍하던 그는 곧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고, 엄석대가 쥐어준 2인자라는 권력의 단맛을 보면서 차츰 변해간다.
엄석대의 권위주의와 독재에 따른 반 아이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지지만 아무도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한다. ‘엄석대 왕국’의 붕괴는 6학년에 올라와 새로운 담임교사가 부임하면서 이뤄진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학생들은 그동안 엄석대의 잘못에 대해 번호순으로 말해보라는 담임의 말에 “저 새끼 진짜 나쁜놈이에요”라고 분노하며 그의 만행을 고발한다. 그렇게 외부에서 온 새 담임의 등장으로 독재자 엄석대의 시대는 가고 반 아이들은 일상의 평화를 찾는다.
또래친구들보다 나이가 몇 살 많고 힘이 세다는 것을 악용해서 온갖 못된 짓을 한 엄석대의 퇴장은 ‘권선징악’의 당연한 수순을 밟는 듯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독재자가 물러나고 자유를 얻었으니 해피엔딩인데 무엇이 문제냐?’라고 무심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허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결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밝히기 전에 ‘역사의 변화와 발전은 누가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조금은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엄석대라는 ‘일그러진 영웅’에 맞선 ‘진짜 영웅’은 새로운 담임교사다. 반면 같은 반 아이들은 우매하고 나약해서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기까지 불의를 보고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오히려 시세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자신들이 힘을 합쳐도 엄석대의 왕국에 맞설 수 없다고 여겼는지,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못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에 가까운 듯하다. 왜냐면 30년의 세월이 지난 뒤 5학년 담임교사였던 최 선생님의 장례식이라는 계기를 통해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된 친구들은 엄석대의 근황을 궁금해 하며 ‘지금 같은 시대에 엄석대 같은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유신독재로 강력한 통치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존재를 회자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당시 5학년 2반 학생들처럼 단순히 기득권 뒤를 좇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소설과 달리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변화·발전을 이끈 힘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닌, 다수의 민중에게서 나왔다. 물론 민중들이 시대의 부조리를 자각하고 행동하게 한데는 일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의 몫이 컸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한병태가 자신은 시골 촌구석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소위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또래와는 다른 눈높이로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다 결국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이성적 판단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 많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이론과 학식을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내놓지만, 결코 다수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려고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 등 민주화 과정에 보여준 민중들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독재에 대항한 민주화의 염원 그 자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발버둥 칠수록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대적 상황에서 더 이상 ‘영웅’이 자신의 삶을 바꿔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은 현시대에도 유효하지만, 둘 중 무엇이 됐든 영웅만으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지금, 1960~80년대에 비하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국민들의 삶은 질적 변화했다. 그러나 사회양극화, 불평등한 한미관계 등 여전한 사회갈등과 모순들을 보면 민중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인의식이 발동될 필요가 있다. 특히 실용정부의 등장을 놓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옛말처럼 경제발전만 된다면 도덕적 자질은 상관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다시금 다수 민중들의 힘을 자각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김지훈 기자 news-1318virus@hanmail.net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작품을 보면 1950년대 말 우리사회 정치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시골의 한 국민학교 5학년 2반이란 공간은 부정부패가 난무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절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모습이다. 급장인 ‘엄석대’란 인물을 중심으로 한, 반 내 권력관계는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엄석대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공부도 잘하고 통솔력 있는 ‘모범생’으로서 학교에서 평판이 좋다. 하지만 실제 그는 공부 잘하는 친구의 시험지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급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점심시간마다 마실 물을 떠 올 당번을 정해둔다거나, 돈과 물건을 빼앗는 ‘나쁜’인물이다. 여기에 서울에서 한병태가 전학 오면서 분위기는 반전 될 듯 했다. ‘진짜 모범생’인 한병태는 엄석대의 권위주의에 반항하며 여러가지 문제제기를 하지만, 친구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고자질쟁이라는 오명을 쓰고 담임교사와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그렇게 혼자 전전긍긍하던 그는 곧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고, 엄석대가 쥐어준 2인자라는 권력의 단맛을 보면서 차츰 변해간다.
한병태는 엄석대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다 결국 권력의 단맛에 굴복하고 만다.
새로 부임한 담임교사는 엄석대의 왕국으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켜주는 ‘진짜 영웅’처럼 그러진다.
민주국민장으로 치루어진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는 학생, 시민, 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년 노무현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거대한 촛물의 파도를 이뤘다.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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