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대를 연 이명박 대통령. 사진은 지난해 5월 2일, 이명박 정부 들어 처음으로 촛불 시위가 열린 날이다. 이때 이 대통령이 국민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날 시국선언은 없었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청소년칼럼] 대학 교수들과 청소년들의 시국선언을 바라보며
김용제 기자는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청소년 기자입니다. 또한 청소년 시국선언에도 참여했습니다. 칼럼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약 1년 3개월이 지났다. 어느 정부라도 이정도 초기에는 항상 마찰과 진통을 겪기 마련이다. 그 초기의 잘 맞지 않는 부분을 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똘똘하게 잘 굴러갈 만한 내각을 만들고, 민생을 알고 대외관계를 파악한 후, 그러니까 출발 채비를 한 후 스퍼트를 올리는게 일반적이다.
근데 이 정부는 초기부터 ‘뻘짓’을 제대로 해 주셨다. 국민들이 싫다 싫다 하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기어코 추진해서 ‘촛불시대’를 개막해주신 거다. 이 ‘소통 불능’ 정부는 눈 감고 귀 막은 다음 ‘오해입니다’를 연발하며 곤봉을 마구 휘둘러댔다. 초기에는 차벽으로 꽁꽁 에워싸고 물대포 직사 정도로 끝내더니, 좀 시간이 흘러 시민이 지쳐 집에 돌아가자, 남이 싫다는거 하기 좋아하는 이 변태 정부는 ‘옳지!’ 하고 시위자들을 두드려 패고 연행해갔다.
올해는 작년보다도 참담했다. 경찰은 작년의 촛불집회에서 뭔가를 배웠다. 촛불은 주모자가 없으니, 수뇌부를 족쳐서 시위대를 말살하던 종전의 방법이 도통 통하지를 않는거다. 그들이 주모자, 주동자, 선동꾼, 시위꾼 이라 칭하고 연행하던 사람들은 그냥 ‘조금 더 책임감을 느끼던’ 일반 시민 중의 일부였고, ‘그냥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이 생각해 낸 것이 ‘겁주기’, ‘봉쇄하기’ 다.
헬게이트 명동에서 시민들은 ‘공포’를 느꼈다
5월 2일, 명동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경찰은 구경하던 사람들이든, 닭꼬치 팔던 노점상이든, 데이트하러 나온 커플이든, 관광하러 나온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 회사원이든, 자기 선배가 잡혀갔다고 항의하던 여고생이든, 사람들 왜 잡아가냐고 묻던 지체장애인이든 죄다 잡아갔다. 그야말로 겁을 확실히 준 거다.
그 뒤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무차별 연행에 대해 증거 제시를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연행당하는’ 사진을, 전경에게 발길질을 당해 늑골이 3개 부러진 일본인 관광객에게는 ‘앞으로는 일본어로 해산방송 할게요~’라는 어이가 땅을 치는 답변을, 여자친구 만나러 나왔다가 연행된 회사원에게는 ‘만났으면 집에 가지 왜 남아 있느냐’라는 답변을 해줘서 웃음을 줬다.
예.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망신시켜 주셔서요. 촛불집회가 국가브랜드를 떨어뜨린다는 소리를 지껄일 때는 언제고, 이웃나라 관광객을 두드려 패고 있나? 불법 폭력 시위를 하기 때문에 진압한다는 시위대에게는 왜 선제 공격을 하나? 정말 ‘조잡한’ 경찰이다.
군부 독재 보내니까 이젠 ‘전경독재’ 정부
그리고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곧바로 분향소를 짓밟았다. 정말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치졸하고 더러운 짓이다. 어떻게 고인에게 애도의 뜻을 기리는 분향소를 전경들로 둘러싸 짓밟고, 고인의 영정을 바닥에 내팽개칠 수 있나? 경찰들은 진정 더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 맞는건가? 서울광장은 시민들의 공간인지, 전경버스와 함께하는 조형예술의 현장인지. 아니면 잔디 사육장인지 모를 정도로 전경버스로 둘러싸고 인권은 연행해간다.
사람은 어떤 일에 자기 의사가 통하지 않고, 내가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될 때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거나 엄청난 답답함에, 심지어 신체적인 고통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만큼 ‘답답함’ 이란 인간의 존재 의미를 말살한다는 측면에서 거의 고문에 가깝다.
이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답답함’의 고문을 내리고 있다. 눈 감고 귀 막고 ‘오해입니다’를 연발하며, 전경버스를 휘둘러댄다. 전경은 좋은 방패막이다. 그들 개개인은 마치 난징 대학살 때의 일본군처럼 ‘허용된 폭력’ 과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 그 해방감을, 시민을 폭행하는 데서 찾는다. 엄마, 아빠, 동생, 형, 누나일 뿐인 일반 시민들을 ‘불법 폭력 과격 시위대’로 규정하고 스스로의 분에 못 이겨 무지하게 패댄다. 하지만 전경은 단지 마네킹일 뿐이라는 여론과 ‘공권력’ 이라는 미명의 비호 아래, 여리디 여린 양심을 숨겨 버린다. 그리고 주 세력은 뒤에서 웃는다.
이 조잡하고 파렴치하고 유치한 작전에 시민들은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전문 시위꾼도 아니며, 친북 좌파 빨갱이도 아닌, 그냥 대한민국에 밑도 끝도 없는 애정을 가진 멍청한 내 친구는 서울 버스광장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놔 빡쳐’
빡치는 정부에 반기를 들다
오죽하면 지식의 상아탑인 대학의 교수들조차 시국 선언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고 재밌게 뛰어놀아야 할 청소년들마저 시국선언을 할까.
오죽하면 민주주의의 거대한 위기라고 할까.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 원칙과 소통이다. 무조건 내 말이 맞다는 독단적인 자세도 안되고, 귀 막고 눈 감고 소리지르는 자세도 안된다. 국민의 의견을 다 반영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반응은 보여야 하는거다. 단 한 명의 시민이 문제를 제기해도, 그 의견이 합당하면 더 조사를 해서 시정해야 하는게 정부다. 대한민국은 이명박 정부의 소유물이 아닌, 정당한 소유주인 ‘국민’이 정부에게 ‘관리 위탁’을 맞긴거다. 그걸 자기들 것인양 이리 볶고 저리 볶다가 사람들 저항하자 곤봉으로 쓸어내는 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거다.
그래서 대학 교수들이 뜻을 모은 거다. 촛불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청소년들이 또다시 뜻을 모은 거다. 군부독재를 계승한 전경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원래 국민의 대표자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국회는 그 빛을 바랜 지 오래다. 정치정당이 국민의 뜻을 수렴해 정부를 압박하고 법을 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의를 스스로 말살해 버렸기에, 국민은 스스로 나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시국선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수들은 지식의 탐구자로서, 교육자로서 큰 존경을 받아왔다. 그만큼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무게가 있다. 그만큼 자기 행동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낄 교수들이 시국선언이라는, 어찌보면 참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이 시국선언의 적정성과 정당성은 일단 제쳐놓고, 시국선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 반세기 넘는 우리나라 역사는 독재와 싸우는 민주항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승만 독재정권 때도 그랬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때도 그랬다. 교수들은 그때마다 조금 늦더라도 자신들의 무게를 보태고 목소리를 냈다. 그 시국선언이 지금 또 발동된 것이다. 지금은 ‘전경독재’ 정권인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그옛날 학살정권 때와 비견될 바는 아니다. 그래서 괜히 ‘오버’한다고,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때처럼 사람이 픽픽 죽어나가고 옆집 아저씨가 갑자기 어느날 안보이던 때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의 시국선언이 가지는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더 나아진 상태에서도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 진정 민주주의는 성숙해지는 것이기에.
자, 이제 청소년들의 시국선언으로 가보자. 지금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과 여러 청소년 단체들, 그리고 많은 청소년 네티즌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하고 있다. 건방진가? 아무것도 모르는 청소년들이 감히 ‘시국선언’ 운운하는 것이?
청소년들의 시국선언이 가지는 의미
어떤 점에서는 이 정부에게 참 얄궂게도 고마운 부분이지만, 청소년들에게 정치를 일깨워줬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아직도 많은 청소년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조금씩 사회에 대해, 바른 것에 대해 깨달아간다.
이들의 시국선언은 결국 ‘미래의 주체’들의 시국선언이며, 무능한 기성세대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고, 스스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닫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으로서의 성장이다. 절대로 그 가치가 폄하되고 일개 몇몇 할 일 없는 중고등학생의 놀이라고 격하되어서는 아니된다.
시국선언을 폄하하는 이들의 주요 골자 중 하나가, ‘니들이 시국선언을 하든 굿을 벌이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 이거다. 한마디로 어디에 압박을 줄 수 있는 ‘무게’가 있느냐 이거다. 근데 사실 그런거 필요 없다. 청소년들의 시국선언은 그냥 청소년들에게 많이 알리면 장땡이다. 청소년은 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청소년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가엾은 정부는 ‘가능성’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정부와 기득권층은 교육정책을 뒤흔들어 청소년들을 또다시 바보로 되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닥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통하겠다는 정부는 오해 정부가 되었다. 이 모 대통령님은 공식 석상에서 대한민국은 사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웃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맞다. 서해, 남해, 동해, 오해. 사면이 제대로 바다다. 그것도 깝깝한 망망대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제 뜻을 펼칠 수 있게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을 본받진 못하더라도, ‘대통령 욕을 해서 국민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던 이전 대통령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면 안될까?
웹툰 만화가 양영순 님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다스린다 하면 잡배들은 제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반면에 영웅은 소통하려고 해.”
대한민국은 어리석게도 영웅을 보내고 잡배를 받아들여 버렸다. 이제 이 거대한 범선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김용제 기자 takross@daum.net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지난 5월 2일, 이날만큼 명동은 패션의 거리가 아니였다. 평소 쇼핑하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던 명동은 이날, 촛불 시민을 연행하는 경찰들로 발디딜 틈 없었다. 경찰은 연행을 피해 상가로 대피한 시민을 끝까지 쫓아가 연행했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날,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메운 경찰들. 시민들은 추모마저 맘놓고 하지 못했고, 결국 다음날 분향소는 철거됐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시국선언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쓴 글들. 21세기청소년 공동체 희망에서 시국선언을 시작한지 이틀만에, 2,000여명의 청소년이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2MB 그만하자’라는 피켓을 든 청소년, 지금 청소년은 ‘불통 정부’인 이명박 정부에 맞서고 있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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