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이 죽기 직전 남긴 말인 ‘로즈버드’는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형이상학적 화두’다. 그 뜻을 궁금해하는 이들을 진실게임으로 유도해 진리를 탐구하게 만들고, 결국 삶을 풍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
한 언론 재벌의 일생을 다룬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년)은 많은 이야기들의 퍼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만큼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기에도 충분하다. 케인의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부와 권력의 의지는 정치철학의 대상이 되며, 그의 일생 자체가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 케인>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영화 내용의 철학적 메시지보다, ‘영화 구조의 철학’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단어가 되었다는 ‘로즈버드(Rosebud)’로 영화는 시작하고 그것의 의미(또는 무의미)에 대한 암시로 끝난다. 케인이 죽기 직전 말했다는 ‘장미 봉오리’가 그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적하는 것이 전체 줄거리를 이룬다. 케인의 마지막 말에 흥미를 느낀 뉴스 영화 편집자는 톰슨 기자에게 그 의미를 알아내라는 임무를 준다. 톰슨은 케인과 밀접한 사이였던 인물들을 인터뷰한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여러 사실을 알게 되지만 마지막까지도 로즈버드의 의미를 밝혀내지 못한다. “그 단어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아요.”
로즈버드 의미를 쫓는 기자… 취재로 밝혀지는 케인의 삶
그리고 모두 관조하는 관객… 영화가 담은 ‘형이상학 놀이’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다는 사실이다. 뛰어난 감수성의 관객이라면 영화의 처음부터 추측할지 모르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로 알게 된다. 관객은 로즈버드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장미 봉오리 그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 안에 있는 톰슨 기자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는 마지막 이미지와 함께 영화의 이야기가 완전히 종결하기 전에 취재 임무를 마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 구조에서 로즈버드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형이상학적 화두’이다. 갑자기 형이상학이라는 말에 당혹스런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설명해보자. 톰슨이 취재를 시작할 때, 로즈버드는 케인 인생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는 ‘말’이었다. 케인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것 같은 말이었다. 마치 태초에 ‘말’(세상의 진리를 담은)이 있었던 것과 같다. 진리를 담은 말은 구체적으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을 통해 세상의 의미를 캐도록 유도한다. 톰슨이 말한 것처럼 그 단어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케인의 삶은 풍부하게 설명된다. 형이상학이란 공허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으니 공(空)하고 허(虛)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준다. 청소년들도 많이 읽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야.” 이는 형이상학적 대화의 전형이다.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진리 게임을 유도한다. 하지만 진리의 실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지 못하지만 게임의 과정에서 삶이 풍부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톰슨은 자신도 모르게 형이상학적 화두를 갖고 진리를 찾는 구도자와 같이 행동한 것이다. 진리의 언어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지만, 생각하는 삶을 살게 해준다. 형이상학은 우리를 알게 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이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했던가!) 영화 <시민 케인>을 두 번 보기를 권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로즈버드의 비밀을 알게 된 관객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형이상학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좀 과장하면 ‘신(神)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형이상학의 답을 즉각 아는 자는 절대자뿐이기 때문이다. 그 답은 절대자에겐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을 화두로 진지한 탐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의 핵심이다. 신은 그를 관조한다.
이렇게 되면 영화는 삼중 구조를 갖게 된다. 영화 안에서 로즈버드의 화두로 케인의 일생을 쫓는 톰슨, 취재 과정에서 밝혀지는 이야기 속의 케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영화 밖에서 관조하는 관객이 그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의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이용해 형이상학적 게임을 제공하면서 작품 구조의 차원에서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영화가 되었다는 것일 게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그리고 모두 관조하는 관객… 영화가 담은 ‘형이상학 놀이’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다는 사실이다. 뛰어난 감수성의 관객이라면 영화의 처음부터 추측할지 모르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로 알게 된다. 관객은 로즈버드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장미 봉오리 그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 안에 있는 톰슨 기자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는 마지막 이미지와 함께 영화의 이야기가 완전히 종결하기 전에 취재 임무를 마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 구조에서 로즈버드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형이상학적 화두’이다. 갑자기 형이상학이라는 말에 당혹스런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설명해보자. 톰슨이 취재를 시작할 때, 로즈버드는 케인 인생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는 ‘말’이었다. 케인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것 같은 말이었다. 마치 태초에 ‘말’(세상의 진리를 담은)이 있었던 것과 같다. 진리를 담은 말은 구체적으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을 통해 세상의 의미를 캐도록 유도한다. 톰슨이 말한 것처럼 그 단어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케인의 삶은 풍부하게 설명된다. 형이상학이란 공허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으니 공(空)하고 허(虛)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준다. 청소년들도 많이 읽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야.” 이는 형이상학적 대화의 전형이다.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진리 게임을 유도한다. 하지만 진리의 실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지 못하지만 게임의 과정에서 삶이 풍부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톰슨은 자신도 모르게 형이상학적 화두를 갖고 진리를 찾는 구도자와 같이 행동한 것이다. 진리의 언어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지만, 생각하는 삶을 살게 해준다. 형이상학은 우리를 알게 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이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했던가!) 영화 <시민 케인>을 두 번 보기를 권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로즈버드의 비밀을 알게 된 관객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형이상학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좀 과장하면 ‘신(神)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형이상학의 답을 즉각 아는 자는 절대자뿐이기 때문이다. 그 답은 절대자에겐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을 화두로 진지한 탐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의 핵심이다. 신은 그를 관조한다.
이렇게 되면 영화는 삼중 구조를 갖게 된다. 영화 안에서 로즈버드의 화두로 케인의 일생을 쫓는 톰슨, 취재 과정에서 밝혀지는 이야기 속의 케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영화 밖에서 관조하는 관객이 그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의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이용해 형이상학적 게임을 제공하면서 작품 구조의 차원에서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영화가 되었다는 것일 게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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