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에 있는 세계술문화박물관의 들머리. 증류기와 오크통으로 장식했다.
[매거진 Esc] 허시명의 알코올트래블
술버릇에서 술의 과학까지, 가족끼리 가볼만한 안성과 충주의 술 박물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술도가를 많이 돌아다니다보니 이제 충고도 한다. 술 빚으면 돈을 벌 수 있겠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충고를 한다. “대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시지요. 일, 이년 안에 투자금액을 뽑으시려면 목 좋은 데서 음식점을 하시구요.”
양조장에서 버린 역사를 수습하다
지방의 큰 양조장에 근무했던 기술자에게 들은 얘기다. 회사 주인이 바뀌니,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지하 창고 정리였다. 그 창고에는 창업주가 쓰던 낡은 양조용기와 술병과 기록물들이 있었다. 어느 양조장은 클린 정책을 편다면서, 10년 이상된 자료는 몽땅 버렸다고 했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도 있듯이, 양조장은 역사가 자산이다. 우리 양조장들은 오래된 곳들도 있는데, 그 역사의 규모를 보여줄 만한 양조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돋보이는 곳이 술박물관이다. 오늘은 경기도 안성의 술박물관을 거쳐 충주 술박물관까지 여행해보자. 정식 명칭은 안성은 대한민국술박물관이고, 충주는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이다. 스케일이 크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세계를 아우르겠다는 의욕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두 곳 모두 양조업자와 무관하다. 술을 빚어 돈을 번 주류회사에서 거느려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다. 안성은 수원에서 주류유통업을 하는 박영국 박영덕 형제가 운영하고, 충주는 두산과 디아지오에서 일했던 위스키 마스터블렌더 이종기씨가 운영하고 있다.
안성술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전통주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으로, 한마디로 “양조장에서 버린 역사를 다시 수습하여 전시해놓은 곳”이다. 아직 따지 않은 녹슨 뚜껑의 술병에서부터 희한하게 생긴 소줏고리, 뱀이 항아리를 감고 있는 듯한 냉각 항아리, 주방문(우리 고유의 가양주와 전통주에 대해 정리한 글)이 적힌 고문서, 술 기사가 실린 옛날 신문, 이렇게 열거할 수 있는 물건이 4만점이나 된다. 그 물건들을 수습할 자금은 둘째 치고 시간은 어디서 났으며 어떤 수완으로 모았을까 궁금해, 유물 한 점 보면 관장 얼굴이 한 번 더 봐진다.
항아리에 대정(大正)이니 소화(昭和)니 하는 일본 연호가 적힌 것이나, 양조장 이름이 적힌 술항아리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이제 유물 가치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내놓지 않거나 새로 주인을 찾아 들어간 상태다. 그렇다보니 돈 많이 준다고 구해질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다. 박영국 관장은 많이 돌아다니다보니, 이제는 전국의 골동상들이나 고물상들이 자신을 “술에 미친 놈”으로 알아 오래된 물건이 들어왔다는 제보를 해온다고 했다.
안성술박물관과 연계해서 가볼 만한 곳이 충주술박물관이다. 탄금호 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세계 110개국에서 수집한 1만점 이상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어귀는 몸을 반쯤 땅에 묻은 거대한 증류기가 지키고 있다. 19세기에 제작된 증류기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회사에서 쓰이다 이천 씨그램 공장에서 퇴역한 것이다.
오크통을 통통 두드리면 위스키향이…
박물관 안에는 와인, 맥주, 위스키의 제조에 관련된 용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중해에서 건져 올려 패각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암포라라는 와인 항아리도 있고, 프랑스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에서 쓰던 브랜디 증류기도 있다.
흥미로운 전시물은 증류주관에 있는 위스키 오크통이다. 오크통 안에서 위스키가 숙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크통을 통통 두드리면 위스키향이 밀려온다. 오크통의 한 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아서, 그 구멍으로 나오는 향기다.
27년 동안 주류회사에 몸담은 이종기씨는 우리에게 텅 비어 있는 것이 음주 문화고, 꼭 필요한 것이 음주 교육이어서 술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했다. 술이 익어가는 것은 술꾼에게만 흥미로운 게 아니다. 미생물들이 이뤄낸 발효 과학이고, 연금술사들이 구축해놓은 증류 과학이라, 교육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게 많다.
그리고 술은 입으로만 맛보는 게 아니다. 그 속에 역사가 있고, 과학이 있고, 문화가 있다. 술을 배우려면 술버릇부터, 술 문화부터 배워야 한다. 술박물관은 성인용이 아니니, 가족끼리 가볼 만하다. 안성은 음식점, 충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고, 입장료도 조금 받는다.
안성 대한민국술박물관/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개산리 031-671-3903
충주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043-855-7333
허시명 여행작가·술품평가

프랑스에서 쓰던 브랜디 증류기.

세계술문화박물관에서 바라본 탄금호의 한가한 풍경.

한 시절을 풍미했던 술병과 술 주전자들.

허시명의 알코올 트래블

안성에 있는 대한민국술박물관.

대한민국술박물관에는 전통 양조 기구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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