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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뻑이 부족해 배우로서 힘들때 많아요”

등록 2010-10-14 14:09수정 2010-10-17 11:46

배우 이윤지
배우 이윤지
[매거진 esc] 김어준이 만난 여자
‘프루프’로 연극무대 서는 이윤지
이게 다 슈퍼스타케이 때문이다. 몇 주 전 우연히, ‘슈퍼위크’ 편을 봤다. 음, 아메리칸 아이돌 저가 모조품이구만. 게다가 슈퍼스타, 슈퍼위크라. 아, 촌발. 저 80년대적 작명 센스라니. 멍한 남자 하나와 묘한 여자 하나가 기타 메고 나온 순간까지도 그렇게 심드렁했다. 그런데. 인트로 반주부터 압권이다. 이럴 수가. 그 연주 화음 음색 편곡. 탄복, 흥분, 감동.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기계적 효과나 전자적 보정 없이, 격렬한 군무나 화려한 의상 없이, 그저 어쿠스틱 사운드 하나에 이리 매료되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가. 대중음악씬이 아이돌에 의해 전면 점거당한 후, 이 노래 괜찮군, 저 춤 멋지네, 그 아이 귀엽다 정도가 대중음악이 줄 수 있는 감흥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게다. 의상, 외모, 군무, 개인기 따위가 아니라 결국 제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과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가수를 결정짓는다는 걸. 슈퍼스타케이에 대한 열광은 바로 그 본질에 대한 열광이다. 하여 김지수와 장재인의 ‘신데렐라’는, 가수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대중으로 하여금 다시 기억해내게 만든, 결정적 순간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기록되어 마땅하다.

김어준이 만난 여자
김어준이 만난 여자
그딴 식으로 흥분해 있던 지난주 어느 날이었다. 다시 한 번 우연히, 기사 하나와 조우한다. 누구누구의 섹시화보. 연예뉴스 카피에서 ‘섹시’와 ‘화보’의 등장 빈도는 조사 수준이다. 그러니 클릭조차 않았을 게다. 그 누구누구가 아주 오래전, 한 잡지의 용병으로 잠시 인터뷰한 적 있던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당시 그 아이가 나이에 비해 인상적인 수준으로 영민하지만 않았더라면. 하여 그 아이가 세상 풍파 적당히 겪고 어느 순간 사회에 눈떠 적당한 정도의 부채의식 가지며 10년만 제대로 성장한다면, 매우 지적인 배우가 되어 있을 거란 상상을 하지 않았더라면.

섹시화보와 그 이름의 조합이 형용모순처럼 느껴진 건 그래서였다. 그리고 그래서 부아가 났던 게다. 마치 장재인이 댄스그룹의 일원이 되어 노래 대신 춤출 수밖에 없는 시장상황을 목도한 것처럼.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되고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일이 그리된 게라. 하여 직접 따지러, 그 아이, 이윤지를 만났다. 오지랖 넓게도.

어째 기억보다 얼굴이 더 작다. 간혹 비현실적인 비율의 연예인 두상을 면전에서 확인할 때면 그 얼굴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들어가나 보려고. 딱 그 사이즈다. 어쨌거나 개막 앞둔 연극 연습으로 촉박하다니 연유부터 읊었다.

그 옛날 인터뷰 메모에 딱 넉 줄 적혀 있더라. 영민함, 감수성, 모범적 그리고 어른들과 잘 지내겠음. 무슨 소리냐.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 좋은 말로 하면. “나쁜 말로 하면요?” 기대되는 대로만 하겠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섹시화보를 찍었네. 수잔 서랜든 될 줄 알았는데.(웃음) 이유가 뭘까. 첫째, 사고 쳤다. 사고 친 여배우들이 야한 영화로 컴백들 하니까. 둘째, 한국 사회가 일정 나이의 여배우에게 요구하는 어느 정도의 선정성. 그 요구에 부응하기로 했다. 셋째, 사람들은 모르는 나를 드러내고 싶어서. 넷째, 어쩌다 보니까.(웃음)

“4번이요.(웃음) 물론 대중들이 제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고 결국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 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그 사진이 바로 그런 대중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저버리기 시작하려고 찍은 건 아니에요. 전혀.”

배우 이윤지
배우 이윤지

아, 초장부터 어긋나는 답변. 2번이어야 내가 승질도 내고 연예계 일반에 대해 시비도 걸고 할 텐데 말이다. 해서 한 번 더 채근했다. 항상 비슷한 방식으로만 소비되어 왔으니 이젠 섹시한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단 바람은 없었고? “1퍼센트도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굉장히 미약한. 물론 제가 계속해 비슷한 캐릭터만 제안받긴 했어요. 그건 강하게 인지하고 있어요.”

그럼 이게 전부 화보 찍은 이들의 음모였단 말인가.(웃음) “그냥 컨셉 1, 2, 3, 4 중의 하나였어요.” 어쩜 좋나. 인터뷰 컨셉 무너지는 소리. 미련이 남아 되물었다. 그럼 우리 연예계가, 일정 나이 이상의 여배우에게, 선정적일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없단 말인가.

“저한테는 그런 요구가 전혀 없다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죠. 실은 그래서 한 번쯤은 이렇게 찍어 봐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마음으로 한 거죠.” 그럼 이제는 기대를 저버리고 싶다거나 청순글래머니 하는 유행에 합류할 수밖에 없겠다거나 하는, 그런 위기의식의 소산이 아니었네. 전혀. “어떡해. 이제라도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거 같아요.”(웃음) 그럼 여기서 인터뷰를 접어야겠다.(웃음)

오케이 그럼 그건 여기서 포기. 두 번째 궁금했던 거. 이 똘똘하고 멀쩡한 처자가, 내 보기엔 남세스럽기만 한 연기라는 작업을, 대체 어떤 정신으로 해내는 걸까. 한 번도 연기라는 걸 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인간에겐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여 이 기회에 따져 두고 싶었다. 예술 따위 언급하는 기름진 언어 말고 그냥 일반의 언어로, 연기란 게 어떤 건지. 무엇이 배우를 배우 되게 하는 건지. 해서 묻기 시작했다. 배역과 실제의 자신이 닮았냐고. 그러기에 쉽게 해낼 수 있는 거냐고.

“닮았냐고 묻는다면, 배역도 결국 사회 안에 있는 거니까, 그 캐릭터 역시 기본적인 사회화는 되어 있겠고 그런 의미에서 반 이상은 서로 닮았다 해야겠죠. 하지만 연기하다 자연인 이윤지로 돌아올 때 그 분리가 확실하게 되지 않아 저는 처음엔 굉장히 (힘)겨웠어요. 예를 들어 캐릭터에 대해 사람들이 귀엽다, 귀엽다 하면 저도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 그렇다고 그런 포즈(귀여운)까지 취하며 말할 건 없잖아.(폭소)

“그렇게 캐릭터에게 자연인 이윤지가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을 때도 있어요. 친구들이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내 안에 원래 그런 게 있었단 걸 발견하는 건가 아니면 사람이 변하는 건가. “발견하기도 하고 때론 변하기도 하고. 제가 시트콤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주름치마에 반스타킹 입히는데 그거 들고 화장실 가서 울었어요.” 왜.

“입기 싫어서. 전 교복치마 말곤 치마 입어본 적이 없어요. 캐릭터 티라곤 잘 때도 안 입고. 땋은 머리에 그런 걸 입히는데…,제가 큰 영향 받은 작품 때도 처음엔 그랬어요. 대기업 딸인데 차를 박고는 자기가 화를 내요. 처음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어요. 대체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는 걸까. 그런데 그걸 8개월 하면서 그 캐릭터의 사고 구조를 이해하게 되면서 실제의 저까지 조금씩 바뀌는 거죠. 캐릭터에게 영향을 받아서.”

받아들인 거네. “알고 보니까 악의가 없이 하는 행동이거든요. 제가 그 정당성을 찾아내면서 사람들도 그 캐릭터에 대해 쟤가 몰라서 그런 거라고, 저거 귀여운 거라고 받아들이게 되고, 전 또 그런 대중의 리액션에 다시 한 번 부응하기 위해서 그 캐릭터를 더욱 이해하게 되죠.”

배우 이윤지
배우 이윤지

그러니까 배우는 연기하면 그 캐릭터 일부가 자기 안에 살아남는 건가. “제가 버리지 않아서이기도 하구요.” 그럼 실제 자기와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들과 차이 나는 부분은 뭔가. 실제 성격은 더럽나.(웃음) “이번 연극 캐릭터 같은 거. 굉장히 거친 캐서린이란 역을 맡았어요. 욕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사회화되지 못했고 원시적이죠. 늑대소녀를 방불케 하는. 그런데 이걸 마치 연기 변신을 위해 선택한 줄 아시는데.” 의도적으로 택한 게 아닌가. “의도적으로 택한 건 맞아요. 하지만 변신을 위한 게 아니라 내 안에 실제로 있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의도를 가지고 한 건 그 사진이 아니라 이 연기가 그에 해당되는 거죠.”

구체적으로 캐서린의 뭐가 자기한테 있는 건데. 욕을 잘하나. “그런 것도 있겠죠.(웃음). 야성과 지독하게 솔직한 것.” 실제 자연인으론 솔직한데 배우로선 그럴 수 없었나. “전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은 게 아주 분명해요. 하지만 일을 하면서는 그럴 수가 없죠. 이 캐릭터는 그런 표현을 정확하게 하는 게 너무 좋아요.” 싫으면 싫다고 면전에서 말해 버리고 화내 버리고 싶었던 적이 많았구나, 연기하면서. “어휴 그렇게 쓰지는 않으실 거죠? (썼다.) 사회화되지 못한 캐서린이란 아이를 사회화시켜 주고 싶고 때로 그 아이처럼 솔직해지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수많은 감정을 주고받아요.” 캐릭터를 실재하는 인간으로 느끼네. 신기하다. 어떻게 그게 되지. 가짜인데.

“누가 그렇게 말해 운 적이 있어요. ‘없잖아 원래.’ 걔는 당황스러웠겠죠. 없는 걸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게 없다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건가. “저는 그래요. 제가 애쓰며 했던 캐릭터가 있는데 끝난 후 몇 개월 동안 그 캐릭터 이름만 들어도 슬펐어요.” 왜? “없어져서. 죽은 거 같아서.” 스토리가 죽는 거였나. “아니요. 안 죽었어요. 그냥 해피하게 끝났는데. 갑자기 그 아이와 아무 소통할 구멍이 없어진 거예요. 더 이상 대본도 안 나오고. 내 옆에 몇 개월 살던 애가 생명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죽은 것처럼. 그래서 벌써 걱정이 돼요. 캐서린하고는 어떤 방식으로 헤어질까.”

배우란 참 이상한 직업이다. 그럼 이런 건 어떤가. 최민수, 난 그 양반이 항상 웃기다. 왜. 평상시도 무대 위에서 안 내려와서. 한예슬, 난 또 그만 보면 웃기다. 왜. 사람들이 자기를 예뻐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자기가 예뻐 죽어서. 또는 비.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대견해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자기를 대견해해 버린다. 느끼하거나 당혹스럽지. 반대로 그런 타입도 있다. 겸양을 요구받기 전에 자기가 먼저 자숙하고 모범적이 되어버리는. 그들은 심심하다. 요구받는 이상이 되지 못하거든. 아까 어른과 잘 지내겠다고 한 건, 후자를 의미한 거였는데.

“제가 굉장히 후자에 가까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조금만 더 자뻑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살기 편했을 텐데, 배우로 일하기 편했을 텐데. 그게 없어 너무 힘들 때가 많아요. 그리고 비는 제가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그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얼마 전 어떤 프로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5초도 못 봤어요. 상처가 돼서.”

배우 이윤지 프로필
배우 이윤지 프로필
그러니까 난 배우란 기본적으로 그렇게 자의식이 평균 이상으로 과잉된 인간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적어도 연기할 때는. 그런데 이윤지는 다른 방식이네. 머리로 이해하고 그 캐릭터와 친해져 같이 살고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해 극이 끝나면 사람 하나가 죽은 것처럼 느낀다. 다른 사람도 그런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후자의 유형. 심심하다고 하신. 그게 저한테 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분위기 좋다 그래 놓고선 정작 그 배역에는 안 써요.” 그렇게 자신만의 연기론을 한참이나 이야기한다. 그러다 한순간 목소리가 떨린다. 아주 짧게. 놀랍게도 울먹인다. 그러나 이내 되돌아온다. 십년 이상 수많은 이들을 인터뷰해왔으나 상대 감정이 왜 흔들리는지 그 감조차 잡을 수 없었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후 타블로 사건에 대해 자기 방에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와 토를 하는데 계속 그 방에서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란 비유부터 노무현과 이명박에 대한 논평까지 이어졌으나 난 내내 그 순간적 동요가 궁금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배우를 배우 되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그런데 그게 대체 뭘까. 그저 감수성이라 해두면 충분한 건가. 일종의 착란 상태를 의도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무엇이 가수를 가수 되게 하는가에서 시작한 이 인터뷰, 결국 무엇이 배우를 배우 되게 하는가 하는 데서 끝맺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뭔지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이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아무래도 이윤지가 아니라 캐서린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 연극이 끝난 직후에 말이다.

글 딴지일보 총수·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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