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미안하다 진주만아

등록 2012-03-28 18:27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하와이 비행은 언제나 즐겁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눈부셨다. 카우아이 섬을 지날 때에는 울창한 밀림과 협곡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기상정보를 보니 호놀룰루 공항에는 바람이 꽤나 세게 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들뜬 마음 어디에도 그런 걱정이 자리할 곳은 없었고, 조종실 창문 밖 풍경은 나를 천공의 성을 날아다니는 천사로 만들어 버렸다. (거북하셨다면 죄송)

“야, 이거 끝내주는구나! 진주만 공습 때도 이렇게 날씨가 맑았다지?” 나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저~기 정도에 항공모함들이 진을 치고, 거기서 제로 전투기들이 출격한 것 아니겠어?” 나는 쉬지 않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지금 우리가 가는 코스가 아마도 그때 전투기들이 날아간 코스와 비슷할 거야. 오아후섬 북쪽에서 산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진주만으로 날아간 거지. 엄청난 숫자의 전투기들이 한꺼번에 미국 전투함들을 붐! 하고 박살 낸 거야!”

잠시 뒤 우리도 그때 일본 전투기처럼 진주만 남쪽 상공을 지나갔다. 멀리 전함 미주리호와 전쟁기념관이 선명하게 보였지만, 그저 별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다. 고도가 낮아지자 서서히 바람이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비행이 아니라 승마가 돼 버렸다. 나는 안정된 비행경로를 유지하기 위해 조종간을 쉴새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활주로를 코앞에 두고 고도 100피트(30m) 정도에서 갑자기 비행기가 휘청거리며 왼쪽으로 크게 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부처님이 손바닥 위에 손오공을 올려놓고 ‘훅’ 하고 바람을 분 것처럼, 호놀룰루의 하늘은 나를 활주로 멀리 날려보내려는 것 같았다.

“어이쿠!” 날개를 숙여 밀려나지 않도록 웅크려 버텼다. 더는 밀려나지 않게 되자, 이제는 활주로 중심을 향해 비행기를 다시 끌고 들어가야 했다. 착륙까지 시간은 불과 십여초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로 전투기처럼 과격하게 기동할 수는 없다. 가능한 한 짧고 잘게 쪼개어 경로를 수정해나가야 한다. 50피트를 통과하면서 활주로 왼쪽을 타고 들어갔다. 언제든 위험하면 바로 복행(Go-around)할 수 있도록 추력레버를 손으로 꼭 쥐었다. 20피트, 10피트…. 비행기는 서서히 활주로 위로 제자리를 찾았고 부드럽게 중앙선 위에 바퀴가 닿았다.

도착 뒤 가만히 생각해봤다. 왜 하필 그때 거센 돌풍이 나를 밀쳤을까? 단지 고약한 우연이었을까? 그런데 서서히 마음이 아파왔다. 아름다운 하와이도 아직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있나 보다. 내가 제로 전투기를 입에 담으며 경거망동하니 미울밖에. 그래서 날 못 내리게 밀쳐버렸나 보다.

‘미안하다 진주만아! 내 다시 그러지 않을게.’ 더는 비행기가 사람 죽이고 폭탄 나르는 데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한겨레 인기기사>

안철수 “지금 대선 출마한다는 분 없잖아요”
MBC·KBS 박근혜 띄우기?
자동차는 □□□ 로 달린다
300만원으로 100억번 슈퍼개미의 ‘색다른 투자’
4.19kg 셋째딸, 쳐다보기 싫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