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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은 노멀을 사랑해

등록 2012-06-27 18:12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아침 일찍 비행기에 도착하니 금방 내린 커피 향이 코를 녹인다. 한 여승무원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기장님 커피 드릴까요?” “설탕 하나만 넣어서 진하게요~” 나는 노래하듯 대답했다. “네~ 부기장님은요?” 그러자 부기장이 대답하길, “저는 ‘노멀커피’요!” 나는 부기장을 놀리고 싶어졌다. “노인네처럼 노멀커피가 뭐냐? 요새도 그런 말을 쓰니?” 그러나 여승무원이 웃으며 부기장 편을 들었다. “그럼요, 많이 쓰죠! ‘노멀커피’, 얼마나 이해하기 편해요?”

‘노멀(Normal)커피’란 항공 전문용어이다. 단어의 유래는 미스터리이지만, 비행기 승무원들 사이에서 쉽게 통용되는 단어이다. 그대로 직역하자면 ‘정상 커피’인데, ‘노멀’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보편타당의 철학이 워낙 심오한 분야여서 아직도 위키피디아 사전에 그 의미가 등재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양촌리커피’의 아류가 아니냐며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 옹호론자들은 ‘제조법과 당도에서 양촌리커피와 분명 차별화되어 있다’며 조목조목 반론을 제시한다.

사실 노멀커피는 양촌리커피처럼 타서 먹는 인스턴트커피가 아니라 커피메이커로 내리는 드립 커피다. 일단 제조공법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양촌리커피에 비해 당도도 낮다. 제조방법은 195㎖ 종이컵에 방금 내린 커피를 3분의 2만큼 넣고, 여기에 설탕과 프림을 한 개씩 넣은 것이 정설로 통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설탕을 한 개 반 넣어야 한다는 둥, 커피와 물을 3:1로 희석해야 한다는 둥 의견이 분분하여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일부 보수우파들에 의해 ‘기내에서 남자가 제조한 커피는 모두 비정상(Abnormal)커피’라는 이론이 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지만, 소장파들은 “일류 남성 바리스타가 만든 커피를 모두 비정상이라고 규정해야 한단 말이냐?”며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희롱일 뿐”이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농담은 이 정도로 마치자. 커피의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노멀커피’란 말도 이제는 예전처럼 많이 쓰이지 않는다.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노멀’이란 단어는 조종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정상이란 곧 안전을 뜻하기 때문에 어떤 화려하고 거창한 단어보다 믿음이 간다.

내 생각이지만, 이제는 ‘정상’이란 단어를 단지 보편타당이라는 관념적인 의미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가치의 활용을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우리가 모두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비행의 순리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도 똑같이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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