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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어도 고향의 맛

등록 2012-11-07 18:07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케냐 나이로비에서 돌아오며 칼칼한 칼국수에 겉절이 김치를 베어 무는 상상을 했다. 돼지목살 가득 넣어 보글보글 끓인 김치찌개나, 파송송 라면도 내 배를 고문했다. 비행기에서 밥을 먹을 땐 실험적으로 소고기에 샐러드를 섞어 고추장과 버터를 비벼보았는데, 결과는 실패작이었다. 나이 들어서 이게 무슨 반찬투정이냐고 야단맞을 일이지만, 누구나 비행생활을 해보면 알 것이다. 집 나와 일하는 우리들에게 먹거리란 언제나 힘든 숙제이며, 기내식도 처음 한두달만 맛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시장에서 칼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행복해진 배를 두드리며 시장을 나서는데, 새로 개업한 간장게장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게장 네 마리를 주문했는데, 가격이 꽤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국의 게가 아닌 미국 동부 메릴랜드에서 수입된 ‘블루크랩’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크램차우더수프에나 들어 있어야 할 녀석들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여기 간장게장이 되어 누워 있으니, 그 꼴이 꼭 코미디 같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광고였던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에도 출연했던 녀석이니, 간장게장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나중에 먹어보니, 푸르스름한 게껍데기 사이로 살을 파먹는 맛이 특이했다.

외국에서 먹는 한식은 대체로 한국만큼 맛이 없다. 재료도 같지 않고, 그곳 손님들의 입맛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 꼬리곰탕을 먹으면 이게 소꼬리인지 코끼리꼬리인지 분간할 수 없다. 나이로비에서 소 등심을 구워 먹는데, 질기고 팍팍해서 ‘혹시 세렝게티 초원의 물소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신토불이란 말이 단지 마케팅 문구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음식 중에 인상에 남는 것도 있는데, 대체로 한식이라고 말하기에 모호한 ‘하이브리드 음식’이다. 방콕에는 볶음국수를 한국식 진한 해물 국물에 담아주는 요리가 있는데, 양배추 김치와 같이 먹는다. 미국에서는 우(牛)삼겹살에 멕시코 칠리를 얹어 로메인 상추에 싸서 먹는데, 그 맛이 참 오묘하다.

단 며칠을 참지 못해 한식당을 찾아 헤매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정말로 고향을 사랑하나 보다. 맛없는 된장찌개 한 그릇에 행복해하며 10달러든 10유로든 기꺼이 투자한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고향을 잊지 못해 ‘하이브리드 음식’을 만들어낸다. 오묘한 맛 속에는 다른 문화 속에서 내 정체성을 찾으려는 한이 느껴져 마음이 참 애잔하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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