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에서 가장 흔한 여자 가수의 모습은 걸그룹이다. 너무 많아서 멤버들 이름만 나열해도 이 칼럼의 지면이 모자랄지 모른다. 그 다음으로는 발라드 가수들이 많다. 솔로나 팀을 이루어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사랑노래를 하는 여가수들. 솔로로 활동하는 여성 댄스가수들도 많다. 넓게 봐서 포크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도 제법 있다. 여성로커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다섯 손가락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야광토끼라는 아티스트는 대체 어느 범주에 넣어야할 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야광토끼와 비슷한 아티스트는, 적어도 우리나라엔 없다. 알고 있다면, 알려 달라.
야광토끼는 임유진이라는 여성 아티스트의 1인 프로젝트 명이다. 임유진은 인디씬에서는 거물이 된 팀 ‘검정치마’(지금은 솔로지만)에서 키보드를 쳤는데 2011년 돌연 아홉 곡의 노래가 담긴 앨범을 발표했다. 야광토끼라는 뜬금없는 이름으로.
아티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거나, 그게 귀찮다면 인터넷만 잘 검색해 봐도 왜 야광토끼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알 수 있을 테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소설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어떤 장면을 떠올려본다.
때는 초여름. 새벽 두 시가 막 지난 시간. 술과 음악에 취한 임유진은 클럽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과한 춤을 싫어하는 그는 그저 흔들흔들 리듬을 탈 뿐. 음악은 고막으로 마시는 술이라는 그의 주장처럼, 그러고 있노라면 영혼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충분히 취했다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앳된 소녀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되었으려나? 말간 얼굴의 소녀는 목도 어깨도 참 하얗다. 그런데 소녀의 어깨에 작은 문신이 있다. 토끼. 클럽의 조명에 반짝이는 토끼가 마치 스스로 발광하는 것 같다. 그 순간 임여진은 강렬한 감상에 사로잡힌다. 눈앞의 소녀가, 토끼 문신이 마치 이 도시에 스멀거리는 멜랑콜리와 센티멘탈의 상징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 이 느낌을 노래로 만들자. 나만의 노래를. 팀 이름은 야광토끼가 좋겠어!
아마 내 상상은 실제와 다를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언제나 대상과 해석은 다르기 마련이니, 그럴듯하면 됐지. 사실, 이 장면은 야광토끼의 노래를 들을 때 떠오르는 나만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야광토끼의 첫 번째 음반 타이틀은 <서울라이트>(Seoulight).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평범한 여자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도회적인 리듬과 멜로디에 듣기 좋게 실어놓았다. 건반주자답게 선율이 무척이나 풍성하다. 리듬을 앞세우고, 멜로디는 최대한으로 간결하게 만드는 요즘의 추세와는 정반대의 노래들이었다. 80년대, 90년대의 아이콘들인 강수지나 이지연, 김완선의 이름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첫 번째 음반을 내고 난 후, 야광토끼는 오래 동안 숨어있었다. 본인은 활동을 한다고 했을지 모르겠는데, 1년에 노래 한 곡도 채 발표하지 않은 셈이다. 방송국 피디가 느끼기에도 뜸했으니, 대중이 느끼기엔 활동중단에 더 가까웠을 거다.
데뷔하고 무려 5년이 흐른 뒤, 야광토끼는 두 번째 정규음반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1집에서 느껴지던 소녀적 감성은 사라지고, 성숙한 전자음이 채우고 있다. 단순히 일렉트로닉 팝의 성향이 강해졌다고만 볼 수는 없다. 국악을 접목한 노래도 있고, 이디엠(EDM) 장르의 장치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타이틀곡은 당장 애프터 클럽이나 라운지 바에서 틀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2집의 변화를 달갑지 않게 생각할 팬도 있을 것이다. 난 1집이 훨씬 더 좋은데! 하면서. 뭐 그럴 수도 있다. 데뷔 시절의 야광토끼가 선보였던, 타임머신을 타고 온 1990년 하이틴 아이돌 같은 느낌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 역시 그 지점은 아쉽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선보이는 음악은 세상에 둘도 없는 음악이다. 앰83(M83)이나, 골드프랩 같은 일렉트로닉 팝 아티스트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들의 음악에는 서울이라는 콘크리트 숲이 없잖은가. 그 숲에 딱 한 마리 살고 있는 희귀한 동물, 야광토끼가 좀 더 자주 나타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추천곡을 꼽자면, 1집에서는 첫 곡 ‘롱디’(Long-D), 2집에서는 ‘룸314’(Room314)를 추천한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