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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상상력 부재는 출판계의 위기

등록 2007-10-19 20:52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

요즘 새롭게 출간되는 팩션형 역사서를 읽다 보면 대체로 역사학자가 쓴 책보다 비역사 전공자가 쓴 책이 훨씬 재미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상상력이 문제였다. 역사의 엄정함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역사학자의 책보다는 상상력에 더 방점을 두게 되는 문학전공자의 책에서 독자는 더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쳐야 미친다>의 정민, <조선의 뒷골목 풍경>과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의 강명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고미숙,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의 정창권 등은 모두 문학전공자이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이덕일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예외적인 사람에 속한다.

우리가 책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로 드는 것도 늘 상상력이다. 인터넷에 넘치는 정보는 남들이 상상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책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운다. 맞는 말이다. 나도 책의 본문은 물론이고 행간과 여백까지도 철저하게 고려된 편집으로 만들어지기에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므로 책은 미래가 있다고 늘 말해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요즘 책을 보면 출판사가 스스로 망할 작정을 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질이다. 그런데 독자의 상상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책이 넘친다. 특히 학술서나 전문서라는 딱지가 붙은 책이 그렇다. 선행 연구사례를 잔뜩 늘어놓고는 자신의 생각은 코딱지만큼 붙여놓은, 상상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책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오늘날 효용성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책일수록 이른바 ‘우수학술도서’라는 것에 선정될 확률이 높다. 심사위원들이 주로 학자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다보니 나타난 결과다.

이런 책은 사실 원래 시장성이 크지 않다. 그러니 출판사는 최대한 경비를 줄인다. 어떤 출판인은 자사의 편집자는 최대한 보름, 보통은 열흘 안에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낸다고 한 출판강좌에서 대놓고 자랑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직물공장에서 재봉틀 돌리듯 그렇게 만들어낸 책은 그 분야의 전문가도 읽기 쉽지 않다.

이른바 ‘기획출판’의 폐해도 요즘 심각하게 드러난다. 편집자는 기획이라는 ‘고상한’ 일에만 신경 쓰고 교정·교열 같은 ‘하찮은’ 일은 외주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출판사의 책 가운데 질이 떨어지는 책이 적잖이 보인다. 물론 외주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실력이 없으란 법은 없다. 하지만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이 정말 꼼꼼하게 챙기지 않으면 ‘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출판계 내부 경험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요즘 내게는 사람 좀 구해 달라는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온다. 하지만 소개해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최근 한 출판단체에서는 객관식 100문항의 ‘편집교정능력검정시험’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해서 쓸 만한 사람을 찾아보자는 속 타는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출판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기계적인 교정능력을 갖춘 정도가 아니라 인문적 소양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저자와도 격의 없이 글의 내용을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제 출판의 미래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출판계는 스스로 출판의 동량을 키울 근원적인 시스템에 대한 논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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