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가을·겨울 시즌, 디자이너 미구엘 애드로버가 변형한 버버리의 트렌치코트(왼쪽)와 험프리 보가트와 그레이스 켈 리가 주연한 <카사블랑카>의 트렌치코트.
강주연 패션 어드벤처
옷에는 분명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 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중 쏟아지는 빗속에서 고양이를 찾아 헤매던 마지막 장면의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입고 있었던 트렌치코트는 바로 고독과 외로움의 표상이자 시각적 매개체였다. 어떠한 미궁에 빠진 사건이든지 독특한 ‘코맹맹이’ 목소리로 척척 해결해내던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형사 콜롬보에게 트렌치코트는 지적인 이미지를 포장해주기도 했다.
또 대부분의 가족들이 목숨을 잃는 등의 고난 어린 삶을 살다 인생을 마감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역시 쓸쓸했던 말년,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포착될 때마다 트렌치코트 차림일 적이 많았다. 이토록 강렬한 표정을 갖고 있는 옷도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우수’와 ‘외로움’ 그리고 ‘지적인’ 이미지를 ‘몸’으로 말하는 트렌치코트는 현대 패션사에서 ‘젊음’과 ‘반항’을 말하는 청바지와 쌍벽을 이루면서 이들을 뺀 패션의 역사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많이 알려졌듯이 트렌치코트는 1856년 버버리(Burberry)사의 창립자인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햄프셔 지방에서 포목점을 경영하면서 농부와 양치기들이 리넨 소재로 된 작업복을 입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개발했다. 그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원단을 개발하고자 노력한 끝에 기능적인 내구성이 강하면서도 통풍이 잘 되는 놀라운 원단인 개버딘을 내놓았다.
그 뒤 1차 대전 때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도 참호(trench) 속에서 입을 수 있는 전투용 외투로 이 개버딘이라는 신소재를 이용한 것이 트렌치코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군인들은 궂은 날씨에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버버리사는 트렌치코트라는 ‘메뉴’로 따질 때, 거의 150년 전부터 시작된 ‘원조집’인 셈이니, 트렌치코트가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부터 이 코트 자체를 ‘버버리’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150년 동안이나 사랑받아온 버버리의 트렌치코트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일까, 오늘날 적지 않은 다른 패션 브랜드에서도 버버리의 트렌치코트를 변형하고 재해석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0년도에 뉴욕 출신 디자이너 미겔 애드로버에 의해 ‘뒤집어진’(그는 버버리의 안감을 겉으로 만들어 입히는 재치를 발휘했다) 버버리 트렌치코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제 트렌치코트는 재클린 케네디나 케이트 모스와도 같은 하나의 패션 아이콘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디자이너가, 어떤 브랜드가 만들어도, 10년 후, 또다시 100년 뒤에 만들어도 험프리 보가트가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며 옷깃을 세웠던 그 코트의 우수 어린 표정만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리워 더욱 외로워질 때, 혹은 비 오는 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리워질 때, 옆에 함께 두고픈 친구처럼, 트렌치코트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오랜 친구인 셈이 아닐까.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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