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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설] 민주, 그 허약한 이름/유재현

등록 2006-10-19 18:45

시대착오적 군주제와 군부 망령에 질식한 타이
박정희의 악령에 목 졸린 남한의 민주주의
둘 사이엔 우리가 희망하는 만큼 차이가 없다
‘타이 쿠데타’에서 민주주의의 험난한 길을 본다
그저 탱크가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를 둘러쌌을 뿐 거리는 평온했다. 쿠데타에 동원된 병사의 옆에서는 드문드문 기념촬영이 이어졌고 그들이 들고 있던 엠16 총구에는 꽃이 매달렸지만 그 꽃은 병사들에게 병영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는 꽃이 아니었다. 군부는 자신들이 장악한 텔레비전의 모든 채널을 통해 끝임 없이 유감을 표명하고 동요하지 말 것을 청했지만 시민들은 유감을 느끼지 않았다. 상인들은 문을 닫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거리는 평온했고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태국역사상 가장 민주적으로 평가된 1997년 헌법은 탱크에 밀려 이처럼 허망하게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그로써 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무런 저항 없이 10년, 아니 2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권력은 1976년 10월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을 학살하고 산채로 불태웠으며 시체를 거리에 내걸었던, 1992년 시위군중에게 총탄을 퍼부었던 군부의 손에 다시 한 번 넘어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까지의 쿠데타에서는 추인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만 비추어졌던 국왕 푸미폰이 '자신에 대한 불충'을 명분으로 태국 민주주의의 조종을 앞장서 울린 것이다. 1932년 이래 단 한 번도 군부의 편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군부만이 군주제의 기득권을 확고하게 지켜줄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는 이 역겨운 민주주의의 공적은 마침내 쿠데타를 추인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주하는 위치에 등극했다. (입헌)군주제가 자신들의 이익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오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태국 군부도 보상을 받은 셈이다. 태국 민주주의는 군주제를 앞세운 군부의 오랜 전통적 우민 이데올로기에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어야 했다.

대명천지(?)에 왕과 군부의 쿠데타를 접하는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이 범죄적 집단은 태국은 물론 아시아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90년대 아시아를 뒤덮었던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은 능욕당하고 모욕당했다. 쿠데타는 여전히 아시아에 잔존하는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권력들을 위무했으며, 권력이란 민중과 민주주의가 아니라 총과 탱크, 우민정치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을 재삼 확인시켜주었다. 쿠데타는 지난동안 민중의 피와 땀, 눈물로 확대된 아시아의 민주주의에 의해 위축된 세력들을 고무시켰고 예컨대 남한에서는 제1당이자 거대야당인 한나라당의 대변인 유기준이 “태국 쿠데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감상적인 소회를 피력하게 했다.

태국 쿠데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유기준이 처음은 아니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 5.16쿠데타의 주범들에게 태국의 선진적 쿠데타는 주경야독의 대상이었다. 그런 5.16쿠데타가 일어난 지 35년. 태국을 뒤쫓았던 남한은 오늘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저 까마득히 높은 곳 어디에서 왕과 함께 쿠데타를 선보인 태국을 굽어보고 있는 것일까.

발달한 태국 쿠데타의 선진적 사례들을 교범으로 밤을 새며 학습하고 실천에 옮긴 5.16쿠데타는 18년의 군사독재정권에서 끝나지 않고 12.12쿠데타로 이어지면서 남한은 일제 식민지통치기간보다 긴 37년의 세월 동안 군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뒤 두 번의 민주적 정권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오늘 남한에는 쿠데타의 적통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모든 선거를 휩쓸고 다음 정권을 약속하고 있다. 장장 18년 간 남한을 비탄과 고통의 수렁에 빠뜨린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의 위업을 받들어 다음 대통령 자리를 넘보고 있다. 그 막막했던 시대에 개발독재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부를 쌓아온 자가 경쟁하고 있다거나, 군부독재정권의 막막했던 시대에 검사출신으로 출세했던 자가 그 딸이 속한 당의 대표로 있다거나, 그 당의 대변인이 태국을 두고 쿠데타의 추억을 지껄이는 것은 사은품일 뿐이다.

태국의 쿠데타는 90년대 이후 아시아가 이룩했다고 믿는 민주주의의 진전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며 한편으로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남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부정과 부패, 국왕에의 불충이라는 전근대적인 명분에 무너지는 태국의 민주주의와 군부쿠데타의 적녀(嫡女)이거나 적손(嫡孫)에게 흔들리는 남한의 민주주의 사이에는 우리가 착각하는 만큼의 간극이 없다. 시대착오적인 군주제와 군부의 망령에 질식해버린 태국의 민주주의와 박정희의 악령에 목 졸리고 있는 남한의 민주주의 사이에는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희망하는 만큼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재현/소설가
유재현/소설가
이건 또 어떤가. 최초로 등장한 민주적 헌법 아래 금력으로 지지표를 사들여 총리 자리에 오르고 당연히 이윤의 창출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끝에 그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자본가 탁신 시나와트라의 몰락은 참여정부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내걸고 초기부터 우향우의 길로 매진한 한때의 노동인권변호사 노무현의 파산과 기묘하게 오버랩된다. 그 둘을 잇고 있는 것은 우민 민주주의, 형식 민주주의, 자본의 민주주의, 몹시 불충분한 민주주의, 나도 참여할 수 있고 너도 참여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이 통치한다는 바로 그 민주주의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이 물음은 아마도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직도 거칠고 험난한 길을 걷고 있다. 그것은 허구적인 참여와 투표함의 이름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재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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