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골목길의 책방
강주연 패션 어드벤처
한 수입 패션 브랜드의 프랑스인 사장과 점심을 함께 먹은 적이 있다. 영어를 해 가며 식사를 해야 하니 밥 제대로 먹기는 틀렸구나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웬걸, 그는 한국에 산 지 수십 년이나 되었다면서 한국말을 나보다도 더 잘했다. 그때 그가 했던 ‘유창한’ 한국말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한국 소비자들은 참 불쌍해요. 쇼핑의 참맛을 몰라요. 대부분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 위주잖아요. 파리 사람들은 이 골목 저 골목 걸으면서 작은 가게들 위주로 쇼핑하는데, 서울에는 그럴 곳이 너무 없어요.”
반은 한국사람 같았던 그 프랑스 사업가는 진심으로 한국 소비자들을 애처로워했다. 그 말을 들은 지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요즈음에 유독 다시 그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최근 우리 소비자들이 조금씩 ‘덜 불쌍해’ 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의 말처럼 의외로 파리 시내에는 우리처럼 규모가 큰 백화점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백화점보다는 조그만 가게에서 물건 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골목마다 아기자기하고 나름의 개성과 아이덴티티가 살아 있는 매장과 상품 구성으로 손님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대부분 밤에도 쇼윈도의 조명을 끄지 않아 늦은 밤에도 걸으면서 그야말로 ‘아이 쇼핑’도 즐길 수 있다.
반갑게도 우리에게도 조금씩 그런 동네가 생기고 있다. 신사동의 일명 ‘가로수 길’은 물이 오른 지 꽤 되었다. 임선옥, 정욱준, 서상영 같은 패션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모태이자 최근에는 독특한 인테리어 숍과 패션 멀티숍, 예술책 서점, 그리고 정감이 느껴지는 카페들과 바, 그리고 맛집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낮에는 유유자적하게 작고 독특한 가게들을 구경하다가 어스름 무렵이 되면 친구 몇 명을 불러내 소박한 와인 바에 앉아 얼굴이 발그레할 정도로만 한잔하고 나면 누구의 것이든 그날 하루는 ‘장밋빛 인생’이 된다. 강북으로 발길을 돌리면 좀 너무(?) ‘떠 버린’ 삼청동 길이 있다. 눈 오는 날 소복이 쌓인 눈 길을 걸어가 단팥죽을 호호 불며 먹고 군데군데 있는 장신구와 구두 가게를 기웃거리는 맛이 좋았다. 밥 먹기 전에는 꼭 길 앞에 늘어선 화랑 순회를 마치면 더욱 즐겁다. 그리고 내가 최근 아주 좋아져 버린 동네는 가회동 길이다. 아직까지는 쇼핑할 곳이나 머무를 곳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호젓한 길에 햇살이 잘 들어오는 조그만 커피집과 자그마한 구두 가게, 도자기 가게 등이 여유로운 낮 시간을 보낼 만하다. 물론 아직까지 젊음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있는 홍대 거리도 좋다. 요즈음에는 서교호텔 사거리 부근 골목에서부터 극동방송국 뒤 공영 주차장까지 일자로 이어진 골목에 재미있는 옷가게가 많이 들어섰다. 압구정동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 있는 장식들이 역시 홍대앞답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뭐든지 큰 것을 좋아했던 게 아닐까. 대형 마트, 대형 백화점, 대형 스크린, 대형 아파트 …. 그 커다랗고 잘 정돈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응당 가져야 할 자유 의지의 선택권을 잃고 있는지 모른다. 천천히 걸으면서 천천히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쇼핑의 맛’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는 동네들이 서울에도, 부산에도, 또 어디에도 많이, 많이 생기길 바란다. 대형 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이 땅의 조그만 가게들에게 힘을 주자. 당신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쇼핑한다면 그 가게들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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