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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낭만 사라진 시대의 용감한 낭만주의

등록 2007-03-22 18:35수정 2007-03-22 18:46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

‘1+1 연상 퀴즈’를 흉내내어 질문해 보자. 다음에 열거하는 낱말들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개인, 자유, 해방, 일탈, 퇴폐, 혼돈, 반역, 고독, 방황, 꿈, 상상, 자연, 도취, 쾌락, 감각, 연애, 청춘, 정열, 표현, 분출, 이국취미, 이상주의…. 여러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출제자가 염두에 둔 답은 바로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는 좁게는 독일과 영국에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발흥했던 문예사조를 일컫는 개념으로, 고전주의가 강조한 이성과 질서 대신 감성과 혼란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했다. 한국에서는 1920년대에 동인지 <백조>를 중심으로 활동한 박종화, 이상화, 홍사용 등이 소극적?허무적 낭만주의를 추구했지만, 그 수명은 길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는 순진한 열정으로 간주된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파악과 치밀한 계산이 없이 즉흥적이거나 맹목적인 추구에 머무는 까닭이다. 따라서 생명력이 그리 길지 못하다는 약점을 지닌다. 지금 누군가를 낭만주의자라 부른다면, 그것은 필경 에두른 욕설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용감하게도 낭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내가 있다. 네 번째 시집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을 상재한 박정대 시인이 그다.

‘체 게바라 그리고 로맹 가리에게’

이것은 박정대 시인의 시집 앞머리에 놓인 헌사다. 요절한 남미 혁명가와 자살한 프랑스 작가에게 함께 바쳐진 시집이라니! 적어도 시인이 보기에는 이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끈이 바로 낭만주의였던 게다.

“우리는 바람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생의 주파수를 찾고 있었네//살아서는 유령이었고 죽어서야 비로소 인간이 된 내 영혼의 동지들/입김처럼 그리운 소식을 전해 주던 자정의 라디오 레벨데”(<자정의 라디오 레벨데> 부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아무르 강과 예니세이 강과 그 광활한 자작나무 대평원을 다 지나가면 당도할 수 있는 곳, 어둠이 밀사처럼 먼저 당도해 간판의 불을 켜는 곳, 내 상상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카바레 드 자사생”(<카바레 드 자사생> 부분)

아무렇게나 뽑아 본 구절들에서 시인의 낭만주의적 충동은 예외 없이 발산되어 있다. 라디오 레벨데란 게릴라들의 저항 소식을 전하던 라디오 채널이고, 카바레 드 자사생은 ‘암살자의 주점’이라는 뜻을 가진,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던 술집 이름이다. 시인은 다른 시들에서도 수시로 ‘체 게바라 만세’를 부르짖거나(<마지막이자 처음인 백야>), 로맹 가리를 친구처럼, 심지어는 자신의 분신인 양 여기기도 한다(<감정의 귀향> <해적판 거리> 등).

그러나 굳이 체 게바라나 로맹 가리가 아니어도 큰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비록 체 게바라를 선망한다고는 해도 그가 소속돼 있는 ‘무가당 담배 클럽’이란 “조직의 확장 같은 것에는 힘쓰지 않”는 이상한 조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조직은 “소수일수록 그 힘이 더 극대화되는 묘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거든, 자체 내에 생성 프로그램과 소멸 프로그램을 내장한”(<리컨스트럭션시(市)>). 따라서 그가 종사하는 “혁명은 고요히 타오르는 누군가의 담배 연기”(<투쟁 영역 확보의 밤>)이며, 그가 꿈꾸는 망명은 “내 마음의 안쪽에서 그대 쪽으로의 환한 망명”(<그대는 갸륵한 내 노동의 솔리튀드 광장이었나니>)일 따름이다.

소피아네, 우르가, 슈메이, 갈레 슈우, 라리사, 소흐티 같은 수상쩍은 외국어에 대책 없이 매료되곤 하는 그는 차라리 “완전한 코스모폴리탄, 이 세계의 집시”()가 아니겠는가. “인생을 사용하기 위해/어디론가 결사적으로 떠나야 했고/(…)또한 인생을 잘, 사용하기 위해/필사적으로 사랑을 해야 했”(<안개의 달 26일 결사>)던. 그러니까, 갈데없는 낭만주의자.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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