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지난 10일 오후 일본 도쿄 남쪽의 옛 도시 가마쿠라를 일단의 한국 문학 연구자들이 찾았다. 김재용 교수(원광대 한국어문학부)가 이끄는 ‘민족문학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이었다.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인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이들을 안내했다.
기타(北)가마쿠라역에서 내려 유서 깊은 절 도케이지를 둘러본 일행은 이윽고 길가의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바로 작가 김사량(1914~1950)이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까지 머물렀던 옛 고메신테 여관이었다.
일행이 주인의 안내를 받아 입구의 한 방에 들어가 앉았노라니, 머지 않아 곱게 늙은 부인이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이시야마 유리라는 이름의 이 노부인은 바로 김사량 당시 여관을 했던 요시하라 집안 출신으로, 그에 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2층 끝방에 머물렀던 긴시료(김사량의 일본식 발음)는 여섯 살 소녀이던 저를 아주 예뻐해 주었지요. 집 뒤 산에서 자란 등나무 줄기가 담을 넘어 집으로 내려왔는데, 긴시료는 그 줄기를 그네 삼아 저를 태워 주곤 했어요.”
평양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으며 소설 <빛 속으로>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작가 김사량. 가마쿠라 시절은 그가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기 전 마지막 평화를 맛본 시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여관에서 조카 뻘인 일본 소녀를 귀애하던 그는 사상범 예비구금령에 걸려 1941년 12월 8일 아침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진주만 공습 하루 전이었다.
“아침부터 경찰이 찾아와서 긴시료를 잡아가려 하자 할머니는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 한다고 경찰을 설득했지요. 교직에 계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긴시료와 사상적으로는 공감하는 바가 많으셨어요. 긴시료가 중국에서 항일 전투를 벌였고 한국전쟁에 종군했다가 죽었다는 소식도 나중에 아버지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시야마 유리의 증언은 가마쿠라 시절 김사량에 관한 것으로는 최초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의 귀한 증언을 얻어내기까지는 오무라 교수의 치열한 실증 정신과 인내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고서점에서 발견한 한 장의 엽서에서 김사량의 가마쿠라 주소를 확인한 오무라 교수는 그동안 철을 바꿔 가며 대여섯 차례나 이 집을 찾았다. 그는 김사량 당시 이 집에 살았던 유리를 만나 보고자 현재 이 집의 안주인인 유리의 시누이를 통해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결국 인터넷 덕분에 오무라 교수의 정체를 확인한 유리 여사는 이날 고메신테 여관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과 건물 청사진, 그리고 자신의 어릴 적 사진 등의 자료를 일행에게 보여주고 지금과 달랐던 당시의 여관 구조 등에 관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자신을 만나고자 인터넷 조회까지 거쳤다는 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오무라 교수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1986년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 발견하던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거기서도 웬 일본 사람이 자꾸 찾아와서 윤동주에 관해 물으니까 사람들이 아예 상대를 안 하려고 해요. 일본 사람이니까 더 알려줄 수 없다고도 했지요. 그래도 개의치 않고 몇 번이고 찾아가서 부탁을 하니까 결국엔 협조를 하더군요.” 그는 이날 가마쿠라에 이어 염상섭이 잡지 <창조>를 인쇄했던 요코하마의 인쇄소 자리를 일행에게 안내했고, 안국선과 이광수, 최남선에서 김정한, 안수길, 황순원 등 해방 전에 와세다대를 다닌 30여 명의 한국 문인들 명단을 정리해서 넘겨주었다. “나중에는 이 사람들 하숙집 자리를 안내해 드릴게요.” 일본인 노 교수의 실증 정신이 한국 연구자들을 감동시킨 순간이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결국 인터넷 덕분에 오무라 교수의 정체를 확인한 유리 여사는 이날 고메신테 여관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과 건물 청사진, 그리고 자신의 어릴 적 사진 등의 자료를 일행에게 보여주고 지금과 달랐던 당시의 여관 구조 등에 관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자신을 만나고자 인터넷 조회까지 거쳤다는 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오무라 교수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1986년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 발견하던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거기서도 웬 일본 사람이 자꾸 찾아와서 윤동주에 관해 물으니까 사람들이 아예 상대를 안 하려고 해요. 일본 사람이니까 더 알려줄 수 없다고도 했지요. 그래도 개의치 않고 몇 번이고 찾아가서 부탁을 하니까 결국엔 협조를 하더군요.” 그는 이날 가마쿠라에 이어 염상섭이 잡지 <창조>를 인쇄했던 요코하마의 인쇄소 자리를 일행에게 안내했고, 안국선과 이광수, 최남선에서 김정한, 안수길, 황순원 등 해방 전에 와세다대를 다닌 30여 명의 한국 문인들 명단을 정리해서 넘겨주었다. “나중에는 이 사람들 하숙집 자리를 안내해 드릴게요.” 일본인 노 교수의 실증 정신이 한국 연구자들을 감동시킨 순간이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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