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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바더 마인호프’에서 한국을 본다

등록 2009-08-09 17:52

‘바더 마인호프’에서 한국을 본다
‘바더 마인호프’에서 한국을 본다




허지웅의 극장뎐 /

이란 전제군주의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가 진행중이다. 흥분한 독일 군중의 야유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든다. 무차별한 폭행이 이어진다. 경찰은 방관한다. 마침내 폭력 소요로 비화하자 경찰들이 달려들어 군중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사복 경찰 한 명이 권총을 꺼내 들어 누군가의 머리를 정조준해 발사한다. 총탄을 맞은 남자는 바닥에 뒹굴고 경찰은 자리를 뜬다.

<바더 마인호프>는 1967년 거리시위 중 경찰에 사살당한 베노 오네조르크(한국 관객의 기억 속에서 이한열의 죽음과 정확히 겹쳐지는)와 68혁명의 태동을 복기하며 시작된다. 이 영화는 60, 70년대 극좌파 단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벨로키오의 <굿모닝, 나잇>과 유사하다. 전자는 독일 적군파를, 후자는 이탈리아 붉은 여단을 유려하되 차갑게 조명한다. 아직 채 치유되지 못한 역사를 다룰 때, 연출자들은 가치판단을 최대한 억누르고 온기 없는 시선으로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편향된 해석은 연출자가 의도하는 바를 오히려 미궁 속으로 감추어 밀어넣고 삿대질만 난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더 마인호프>는 흡사 견해차를 가진 두 명의 연출자가 각자의 영역을 나누어 서술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영화의 접합체처럼 보인다.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 그룹(독일 적군파)의 결성을 전후로 급격한 톤의 변화를 드러낸다. 앞서 설명한 풍경으로 채워진 초반부는 종종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남다르다.

그러나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급진적인 테러 행각이 드러나는 중반부와 후반부는 시종일관 빠르고 차가운데다 자주 냉소적이다. 특정 인물을 겨냥한 찬사 혹은 폄훼는 찾아보기 어렵다. 카메라가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며 관객의 눈을 묶어 두는 순간은 주로 주인공들이 자기모순적인 오류를 드러내는 때다. 이를테면 그룹의 리더 격인 안드레아스 바더는 성해방과 진보 투쟁을 주장하면서도 성소수자와 여성들에게 폭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바더 마인호프>가 이루고자 하는 야심은 급진 좌익 테러리즘의 역사적 실패를 새삼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애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집단에 끊임없이 당위를 제공한 상황들의 맥락, 극단적인 투쟁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의도와 사정을 추호도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와 경찰의 무지가 괴물을 만드는 비극을 자초했다는 환기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논점이다. 사회적 비용 따위 얼마든지 감수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듯한 이명박 정권의 곤봉질이 세상을 채우는 동안, 이 영화는 잔인한 공포와 예언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기능하고 있다.


허지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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