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남다은의 환등상자]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를 끝까지 보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 문을 열고 나가는 상상을 여러 번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대의 항의의 표시였다. 영화가 건 게임에 휩쓸리지 않고 똑똑히 본 후, 발언할 것이다, 라는 게 그때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생각이 얼마나 끔찍하고 바보 같은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자리를 지킨 것이 항의라고? 거기에 은밀한 쾌감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보고 말았고, 이제 그다음 내가 선택할 일은 이 영화를 쓰느냐, 마느냐의 여부다. 어떤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태도일 때가 있다. 무슨 견해를 피력하든 일단 논쟁의 중심에 발을 들이는 순간, 비평은 결국 그 영화의 담론 내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쟁은 영화라는 산업, 혹은 외설적 호기심에 대한 싸움이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공모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그런 영화일까.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여러 함정을 무릅쓰고라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대개의 논쟁들, 이를테면 폭력의 수위나 그와 관련된 심의 결과에 대한 찬반론에 관심이 없다. 이 영화가 잔인한 건 맞지만, 이보다 강도가 센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영화의 폭력성이 모방범죄를 일으킬 것이라는 겁에 질린 목소리들에 대해서라면 당신이 사는 이 현실부터 제발 똑바로 보라고 말하고 싶다. 반대로 영등위의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사태에 대해, 마치 그럴 줄 몰랐다는 듯 억울해하는 자들에 대해서라면, 영화를 만드는 일이 결국 세상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는지 되묻고 싶다.
사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이미 초중반, 수현이 범인 경철을 찾아냈을 때 끝난다. 그런데 영화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수현의 복수를 미룰 때, 그 목적은 경철에게 고통을 안기려는 수현의 것이 아니라, 영화의 것이다. 어떤 서사적 의미도 없이 그저 더 잔혹한 스펙터클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그 시간이 미뤄지는 데서 오는 쾌락. 영화가 구경꾼들을 위해 벌어준 시간. 그때 영화는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수현의 자리로 거듭 되돌려 놓는다. 그의 복수심을 이해한다면 복수의 행위도 영화적으로는 용납할 수 있지 않냐고 유혹한다. 하지만 복수는 가학적 쾌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말하자면 영화와 우리는 희생자를 희롱하고 육체를 훼손하는 경철의 시점 쇼트를 즐기면서도 그 시점의 주체를 경철에게 떠넘긴다. 그러니 <악마를 보았다>를 본 뒤, 영화가 상영되는 걸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 자리로 이끄는 우리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것, 차라리 그 편이 솔직하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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