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 [난이도 수준-고2~고3]
렘브란트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와 ‘예수의 얼굴’
렘브란트의 빛은 어둠 속에서 커지는 동공처럼 침착하고 고요하다. 맨 처음 맞닥뜨린 어둠은 실체를 헤아릴 수 없기에 두려움이 더 크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고 있으면, 어둠 속에서 차츰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씁쓸하게도 빛은 어둠의 영역이 본색을 드러낼수록 선명하게 제 몫을 다하며 활활 번져나간다. 어설픈 중간은 허용하지 않는다. 어둠이 깊어가는 답답한 시간동안 외로운 빛과 어둠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의 겨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들여다보는 렘브란트의 그림은 부드럽고 힘 있는 사랑의 메시지로 다가와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한겨울 수도원의 나지막한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그의 그림은 깊이 있고 영성적이다.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감실의 불빛처럼 어둠이 깊어져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화가의 영혼에서 경건하게 나온 빛이기 때문에 그 빛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던 것들을 끊어낸다.
렘브란트는 붓을 들고 절망과 고통의 삶을 걸어가는 우리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들을 귀가 없어 불행한 우리들은 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가 불로 쓴 글씨를 해독해내지 못한다. 그는 악인이 득세하는 환멸의 진흙탕에서 그저 광인취급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뻔히 질 줄 알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목숨과 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느낄 만한 것. 렘브란트에게는 그것이 바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은 날의 영광과 뒤이은 평생의 몰락을 통해 마침내 자신이 가장 찾고 싶었던 진실의 표정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불화했던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는 물질적인 풍요를 잃었지만 예술적인 승리와 영혼의 평화를 얻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돌아온 탕자’에서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과 상처를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위대한 작품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렘브란트의 그림은 빛의 승리를 증명한 거룩한 신비로 충만하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뛰어난 재능을 지닌 덕에 모든 것을 풍족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의 삶은 걷잡을 수없이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 어떤 고통도 그의 예술혼을 짓밟을 순 없었다. 오히려 현실의 잔인한 어둠이 렘브란트에게는 간절한 빛을 향한 목마름으로 확장된다. 젊은 날 렘브란트가 찾아낸 빛이 보석 같은 것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꿈을 찾아 고된 여행을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평생 모진 꼴을 겪을 만큼 다 겪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이 만난 빛의 얼굴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도시는 불타고 예언자는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 목이 쉬도록 예레미야는 멸망을 예언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맨발의 늙고 지친 예언자. 무엇도 그의 회한과 절망을 달래줄 수 없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 이 그림은 1630년에 목판에 유채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어서 소름이 돋는다. 불타는 도성 어귀에서 지금 선지자는 또 얼마나 자책하고 있을까.
팔레스타인 척박한 땅,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서른 셋의 나이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의 소유라곤 어머니가 아마포로 지어준 허름한 속옷 뿐. 그는 아마 말수가 적지만 생각이 깊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어린이들과 함께 있으면 그의 맑은 웃음에 주위가 눈부시게 환해졌다. 그는 위선과 불의를 절대로 참지 못했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편에 섰다. 이것이 그의 죄였다. 어둠과 빛은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빛의 세상이 오면 어둠은 은폐하려고 했던 추악함이 만천하에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 없는 사내를 잔혹하게 죽이며 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한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외롭게 죽는다. 이 세상 많은 화가들이 예수의 얼굴을 그렸다. 그 중에서 나는 렘브란트의 ‘예수의 얼굴’이 제일 좋다. 이 눈물 그렁그렁한 해쓱한 얼굴에는 사람인 예수가 있다. 연민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내 안의 예수님. 그는 하늘의 위엄도, 아우라도 없지만 낡고 거친 옷이 내게는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찾아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괜찮아, 괜찮아’하며 다독여주는 크고 넓은 그 손길. 렘브란트의 예수는 오늘도 책상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위로를 주신다.
희망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등불 삼아 길을 걸어갔던 렘브란트처럼 끝까지 걷다 보면 진실의 얼굴을 만나게 될까? 그때까지는 함부로 입 열어 절망이라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어둠과 맞설 유일한 무기는 빛을 폐기하지 않는 진심어린 빛의 눈동자라는 것을 렘브란트에게 배운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빛’은 처음이자 끝이다. 맨발의 늙고 지친 예언자를 형상화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는 예언자 예레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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