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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주어를 목적어로 바꾸면…

등록 2008-02-24 15:06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 [난이도 = 중2~고1]

오늘은 부자연스러운 피동 표현에 대해 알아보자. 다음은 몇 해 전 한국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던 자막이다: ‘파병 결정 즉각 철회돼야.’ 이것을 이렇게 고쳐서 읽어보자: ‘파병 결정 즉각 철회해야.’ 확실히 뒤엣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들린다. 두 표현의 차이는 단지 ‘-돼-’라는 한 글자가 ‘-해-’로 바뀐 데 있지 않다. 앞에서는 ‘파병 결정’이 주어 노릇을 하고 있는 데 견주어, 뒤에서는 이것이 ‘철회하다’의 목적어로 탈바꿈한 것이다.

여기서, 영어식 문장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뒤엣것은 주어가 없는 이상한 문장 아닌가? 하지만 언젠가 설명했듯이, 우리말에서 주어는 꼭 필요할 때만 밝힌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주어는 왜 밝히지 않을까? 파병 결정을 철회해야 하는 주체는 파병을 결정한 주체와 똑같을 수밖에 없으니, 굳이 주어를 밝힐 까닭이 없어서다.

이른바 ‘쓸데없는’ 피동 표현 혹은 부자연스러운 피동문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 문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명사를(정확히는 체언을) 무조건 주어로 여기는 버릇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어가 없는 문장을 생각하기 힘든 영어(를 비롯한 서구어)의 영향임이 틀림없다. 예를 더 들어보자. ‘왁스가 발라진 작은 판.’ 이건 어느 번역서에 등장했던 표현이다. 이 경우에도 ‘왁스’를 주어로 상정하고 보니 ‘발라지다’라는 피동형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왁스’를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로 생각한다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왁스를 바른 작은 판.’ 누구라도 이쪽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의자’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다. ‘문양’을 목적어로 삼아 ‘정교한 문양을 새긴 등받이’로 표현하면 입에 착 붙는 표현이 된다.

이 두 경우에 ‘바르다’와 ‘새기다’의 주어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판에 왁스가 묻어 있다는 사실이고, 의자에 문양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누가 왁스를 발랐고, 누가 문양을 새겨 넣었는지 굳이 따져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피동사가 있으면 피동형을 쓸 필요가 없다는 원칙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있다. ‘뒤집다’의 피동사는 ‘뒤집히다’다. 그러니 굳이 ‘뒤집어지다’를 쓸 까닭이 없다. 그래서 ‘풍랑으로 배가 뒤집어졌다’는 ‘풍랑으로 배가 뒤집혔다’가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떨까: ‘그 농담에 사람들이 모두 뒤집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어색하다. 이때는 ‘뒤집어졌다’가 훨씬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그 친구하고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이때는 ‘끊어지다’보다 ‘끊기다’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런 예문도 있다: ‘운동화 끈이 끊어졌다.’ 확실히 이 경우에는 ‘끊기다’보다 ‘끊어지다’가 훨씬 자연스럽다.

방금 두 예에서 보았듯이, 엄연히 피동사가 있는데도 피동형이 사라지지 않고 피동사와 거의 대등한 빈도로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물론 이때 피동사와 피동형은 무조건 서로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마다 어울리는 문맥 안에서 독자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우리말은 이렇게 복잡 미묘하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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