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가 주최한 청소년 인권행사에서 청소년 인권에 무관심한 어른들에게 일침을 가한 최영우 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인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 낸 어느 청소년 활동가의 외침
“여기 모여 있는 어른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지금 우산 들고 서계신다고 인권이 바뀝니까?”
8월 23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한 ‘청소년 인권 난장’ 행사에서, 청소년인권에 무관심한 기성세대에게 일침을 가한 청소년이 있었다.
올해로 17살인 최영우 군. 그는 촛불문화제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구속·연행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낸 청소년 활동가이다.
최 군은 “한 전경이 ‘교복입은 애 잡아라’고 외치면 전경들은 떼거지로 몰려들어 교복 입은 학생들을 잡아갔다. 정말 무서웠다. 전경들이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잡아가는 행동을 보고 진정서를 내게됐다”고 밝혔다.
최 군은 진정서를 내기 전부터 청소년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기자는 차분하지만 강렬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라고. 그는 “나의 소중한 친구가 선생님의 차별과 입시로 인해 자살했다”며 “그 친구가 나에게 청소년 인권에 관심가져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때부터 관심갖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래는 최 군과 나눈 이야기다. 국가위원회에 진정서를 낸 이유는? “전경들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물대포를 쏘고 방패로 때리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교복입은 애 잡아라’라는 전경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전경이 교복입은 애 잡으라고 외치면 전경들은 떼거지로 몰려들어, 교복 입은 학생들을 잡아갔다. 정말 무서웠다. 전경들이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잡아가는 행동을 보고 진정서를 내게 됐다. 처음엔 진정서를 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웠다. 진정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것, 그리고 학교에 그것이 알려지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진정서를 냈다는 이유로 큰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진정서를 낸 기자회견에도 나가지 않았다.”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나? “전경의 폭력진압이 시작된 이후로 촛불문화제에 참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학동안에는 기숙학원에 다니면서 입시 공부를 했다. 입시폐지를 주장하는 내가 오히려 더 누구보다도 입시를 원했던 것 같다. 그후 인터넷과 티비를 통해 경찰이 인권을 무시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잔인한 사진들을 보게됐다. 그순간 너무 많은 고민에 빠졌다. 1주일동안 학원도 가지 않고 집에 박혀 고민을 했다. 촛불문화제에 나가 발언도 했던 나의 모습을 되뇌이면서 ‘나의 모습을 보고 나온 청소년도 있을텐데, 이 안에서 혼자있는 내가 너무 비참한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후 다시 촛불문화제에 나가게 되었고, 다시 내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다. 그러다보니 진정서를 낸 한사람으로서 오늘 인권행사까지 참여할 수 있었다.”
인권활동가를 처음 시작한 계기가 친구의 자살이라고 했다. 자세히 이야기 해달라.
“난 초등학교시절부터 컴퓨터를 배우며 해킹에 대해 공부를 했다. 해킹공부를 하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다. 서로의 공통점을 알아가며 친하게 지낸 이성친구였는데, 중학교 때 갑작스레 전학을 가면서 헤어지게됐다.
그 친구는 국제대회까지 나가 상을 받을 정도로 해커실력이 뛰어났고 인정받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컴퓨터만 잘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낙인찍혀, 인정받지 못하는 한 청소년일 뿐이었다.
전학으로 인해 헤어진 상황에서도, 그 친구와 간간히 연락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또한 그 친구가 써놓은 유서에 나에게 남긴 유언도 있었다. ‘나같이 살지 말라고. 넌 공부를 열심히 하고, 네가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살라고. 그리고 청소년 인권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이 순간 난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같은 일이 없었다면 난 촛불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때부터 익명의 활동가로 운동을 실천했다. 나 혼자 개인활동을 했다. 학교에 아침일찍 등교해 ‘청소년 인권은 죽었다’는 팜플렛을 뿌리고, 붙이고 다녔다.”
대단하다. 학교에 걸려 징계를 받거나 하지 않았나?
“나름 이중적인(?) 생활을 해서 걸리진 않았다(웃음). 인권활동을 시작한 것이 친구의 자살도 계기였지만, 4·19와 6월항쟁의 시대를 겪었던 어른 100명을 막무가내로 붙잡아 인터뷰를 한 것도 인권활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19, 6월민주항쟁 시대 어른들을 무작위로 잡고 ‘당신은 그때 무얼했는가’ 에 대해 물어봤다.
백이면 백, 자신이 이명박대통령 안 뽑았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고 한다. 정말 이상했다. 그래서 의문이 풀릴 때 까지 인터뷰를 하는데, 한 어른이 내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민주화 항쟁 참가여부에 대해 묻지말라고. 지금의 민주화는 그 당시 피를 흘린 사람들에 의해서 된것인데, 자신이 참가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정말 부끄럽고 미안해서 거짓말로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질문하지 말라고 했다.
그 순간 약간은 극단적이지만 10년 후 나와같은 청소년이 내게 다가와 촛불문화제 당시 무얼했냐고 물어볼 때 ‘당당하게 촛불을 들었노라, 나쁜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키지 못해 미안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다.”
최영우 군이 생각하는 ‘청소년 인권’이란 무엇인가?
“청소년의 인권은 아예 없었다. 있었다면, 이런 취급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인권을 개선하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인권개선이아니라 새로 만들어야한다.
청소년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른들은 우리를 미래의 유권자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권을 이렇게까지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윤선영 기자 happie89@naver.com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최 군은 진정서를 내기 전부터 청소년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기자는 차분하지만 강렬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라고. 그는 “나의 소중한 친구가 선생님의 차별과 입시로 인해 자살했다”며 “그 친구가 나에게 청소년 인권에 관심가져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때부터 관심갖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래는 최 군과 나눈 이야기다. 국가위원회에 진정서를 낸 이유는? “전경들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물대포를 쏘고 방패로 때리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교복입은 애 잡아라’라는 전경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전경이 교복입은 애 잡으라고 외치면 전경들은 떼거지로 몰려들어, 교복 입은 학생들을 잡아갔다. 정말 무서웠다. 전경들이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잡아가는 행동을 보고 진정서를 내게 됐다. 처음엔 진정서를 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웠다. 진정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것, 그리고 학교에 그것이 알려지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진정서를 냈다는 이유로 큰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진정서를 낸 기자회견에도 나가지 않았다.”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나? “전경의 폭력진압이 시작된 이후로 촛불문화제에 참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학동안에는 기숙학원에 다니면서 입시 공부를 했다. 입시폐지를 주장하는 내가 오히려 더 누구보다도 입시를 원했던 것 같다. 그후 인터넷과 티비를 통해 경찰이 인권을 무시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잔인한 사진들을 보게됐다. 그순간 너무 많은 고민에 빠졌다. 1주일동안 학원도 가지 않고 집에 박혀 고민을 했다. 촛불문화제에 나가 발언도 했던 나의 모습을 되뇌이면서 ‘나의 모습을 보고 나온 청소년도 있을텐데, 이 안에서 혼자있는 내가 너무 비참한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후 다시 촛불문화제에 나가게 되었고, 다시 내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다. 그러다보니 진정서를 낸 한사람으로서 오늘 인권행사까지 참여할 수 있었다.”
청소년인권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최 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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