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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민주 투사’ 이명박?

등록 2008-09-10 14:40

6.3 항쟁 중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경기고 학생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3 항쟁 중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경기고 학생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치] <현대사로 오늘을 읽다 2> 격동의 60년대, 이명박의 모습은 어떠하였나
196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많은 이들이 민주화를 꿈꾸었으나 곧이어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 독재라는 비판을 받은 박정희는 재야 언론인인 조용수를 사형한 뒤, 국민들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경제 성장을 우선의 과제로 삼는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으므로, 미국과의 화의를 위해 반공주의를 드높이고 1964년,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한다. 이를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명박 대통령도 반대했던 ‘한일 기본 조약’

그러나 당시의 너무나도 빈민한 경제 상황때문에, 미국의 원조만으로는 경제 성장의 밑거름을 닦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또다른 원조원을 물색하게 되었고, 곧이어 이웃나라와 조약을 조인하였으니, 바로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이 조인된 것이다.

이 조약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3억 달러의 무상 자금(보상금)을 받고, 5억 달러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아낸다. 무상 자금과 대일청구권 자금은 대부분 경부고속도로를 준공하는데 쓰여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협상 내용 중에는 일본의 조선 강제 점령에 대한 공식 사과와 관련한 구절은 하나도 없었으며, 이를 마지막 ‘식민지 보상금’으로 마무리 지어 그 뒤의 일본 정부의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물론 보상금은 유족들의 품이 아닌 경제 개발을 명분으로 경부고속도로에 대부분 쓰였다).

심지어, 난항이였던 어협 협정과 관련해서는 6월 22일 한일 기본 조약이 조인된 뒤, 25일에는 워싱턴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미국국무장관과 수교문제에 대해 논의 하던 중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라며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3억 달러의 무상 자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전사자 유족들에게 1인당 1만 달러를 배상하였다. 일제강점기 시, 일제에 의한 징용으로 사망한 조선인은 약 16만명, 징병으로 사망한 조선인은 약 5만명이였는데 1인당 1만 달러를 적용하면 약 21억 달러 이상을 받아야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정부는 사망자 1인당 2000불을 청구하였다.

이에 반대해 몇몇 학생들은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며 1964년 거리로 뛰어나왔다.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 18개 대학교에서 대학생 1만 5천명이 나서는 등 총 3만명이 거리로 뛰어나와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였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 검열을 실시 하였다.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 인물과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언론인과 정치인 등 1천 142명이 검거되었다. 계엄령이 군사 정권에 의해 악용되는 순간이였다.

결국 한일기본조약은 조인되었으며 검거된 사람들 중 348명은 내란죄로 구치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게 되었다.

구치소에서 복역을 하게 된 학생들 대부분은 형을 받고 난 뒤 운동 경력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어 취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은 고려대총학생회장으로서 6.3 항쟁을 이끌다 구치소에서 복역을 하게 되었다. 그는 취직이 어렵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당한 취직 방해를 규탄하는 편지를 썼고, 마침내 건설기업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12년만에 대기업의 사장이 된다. 92~94년 동안 6.3 동지회의 회장도 맡았다. 후에는 정치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도 겸하였다.

그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5월 29일 집회, 경찰이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 안치영 기자
5월 29일 집회, 경찰이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 안치영 기자

이 대통령이 한일 기본 조약만큼 퍼다준 쇠고기 협상을 주도한 이유는?

촛불 집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든 최근 촛불 집회 대응에 대해서는 모두가 “강력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것이 적절했던 적절하지 않았던을 떠나, 초기에는 단순히 도로 진입을 막던 경찰들이 물대포와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게 된 데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민주 투사’ 경력과는 사뭇 매치가 되지 않는다. 총학생회장으로서 정부의 굴욕회담을 반대하며 거리로 뛰어나갔던 그가 “1970~80년 빈둥빈둥 놀던 사람들은 나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민주화 세력을 매도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은 무슨 계기일까. 또한 한일 기본 조약만큼 지나치게 ‘퍼다준’ 미 쇠고기 협상을 주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였을까.

안치영 기자 ggonaee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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