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성수씨가 용산 철거민 문제에 뛰어들기 전까지 살던 집. 천막 뒤로 ‘세계최고, 선진용인’이라고 써있는 현수막이 보인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사회] 2008년 5월 9일, 그의 삶을 뒤바꾸게 만든 강제철거
경기 용인시 신봉리 아파트 공사 현장 앞 천막. 지난 20일, 용산 철거민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상인들에게 장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외치다 사망한 고(故) 이성수(50)씨가 마지막까지 살던 집이다.
아파트 공사 현장 앞 천막, 고(故) 이성수씨가 살던 집
겉으로 보기엔 아파트 공사 자재를 쌓아둔 창고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이 씨가 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임시로 만든 주방에는 먼지 쌓인 냄비와 빈 물병이 있었고, 시멘트 바닥보다 차갑던 단 칸 방에는 이씨가 평소 사용한 이불가지가 널려 있었다.
냉장고 대신 사용한 아이스박스 하나, 차가운 겨울밤을 견디게 한 열풍기와 전기 장판 하나만이 여름에도, 겨울에도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천막 앞, 50m도 되지 않는 거리, 지금은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그곳이 이 씨가 그의 부인, 두 아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던 자리였다. 누군가에게 보금자리일 새 아파트가 땅 위에 솟고 있지만, 이 씨가 살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이 씨가 철거당한 때는 지난해 5월. 주거이전비나 이사비용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 철거당한 이웃 4명과 함께 천막을 지었고, 그때부터 이곳 천막이 이 씨가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재개발은 이 씨에게 천막을 지을 땅도 허락하지 않았다. 용역업체 직원들은 천막마저도 강제 철거했고, 그때마다 이 씨는 천막을 다시 지었다. 생계 난을 이기지 못한 이웃들이 천막을 떠나도, 이 씨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부인과 남았다. 2008년 5월 9일 강제철거, 이 씨의 삶을 뒤바꾸다 이 씨네가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4년 전 운영하던 가구공장에 화재가 나면서 거리로 나섰다. 뻥튀기, 막노동 등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래도 커가는 두 아들 때문에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강제 철거 당한 날 모든 행복은 끝났다. 그날은 2008년 5월 9일이었다. 이날 이후 이 씨의 삶은 또한번 달라졌다. 당시 가족들은 몸만 챙겨 나오기 바빴다.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들은 교복도 챙겨나오지 못해 두 달 동안 사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이 씨가 그의 부인과 함께 전국철거민연합에 가입, 철거민 운동에 나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철거민 혼자서 싸우긴 힘들어서 뭉쳤다는 게 이 씨와 함께 철거 당한 후 전철연에 가입한 최완경 씨의 증언이다. 최 씨에게 이 씨는 ‘불의를 못참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이 많고, 사나이답게 의리가 있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한 것은 깨끗이 사과하고 털어버리는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정이 많아서였을까.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도 이 씨는 종종 나섰다. 이 씨는 철거민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도 다른 철거 지역에 연대를 하러 나갔다. 철거민들은 연대를 품앗이라고 말했다. 누가 그를 철거민 운동가로 만들었나 용산 철거 역시, 그냥 뉴스만 지켜보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적어도 이 씨 자신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천막에 사는 지금, 생계를 꾸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자녀들이 커서 생활비를 스스로 벌게 된다면 조금씩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씨는 용산 철거민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 씨는 왜 자신의 일이 아닌 용산 철거민들의 일에 뛰어들었을까. 검찰이 전철연 회원들을 대상으로 수사하는대로 뒷돈 때문이었을까. 일부는 그를 화염병을 던진 과격 시위 꾼으로 보고 있는데, 이런 평가에 대해 이 씨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한 사람은 있지만, 대답할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분명한 것은 2008년 5월 철거 당하기 직전에, 이사비용이나 주거이전비를 받고 최소한의 생활비가 마련되었다면, 애시당초 이 씨는 철거민 운동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씨를 평소 형으로 부르며 따랐던 최 씨는 용산 참사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참만에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말한 이 씨는 “어떻게 저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느냐”고 답답해했다.
마지막으로 최 씨는 “힘없고 돈 없는 서민을 위한 정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이 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가진자들이 좀 베풀어주어야한다”고 밝혔다.
정혜규 기자 66950@hanmail.net
ⓒ2007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즐겨찾기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천막 앞, 50m도 되지 않는 거리, 지금은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그곳이 이 씨가 그의 부인, 두 아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던 자리였다. 누군가에게 보금자리일 새 아파트가 땅 위에 솟고 있지만, 이 씨가 살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이 씨가 철거당한 때는 지난해 5월. 주거이전비나 이사비용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 철거당한 이웃 4명과 함께 천막을 지었고, 그때부터 이곳 천막이 이 씨가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재개발은 이 씨에게 천막을 지을 땅도 허락하지 않았다. 용역업체 직원들은 천막마저도 강제 철거했고, 그때마다 이 씨는 천막을 다시 지었다. 생계 난을 이기지 못한 이웃들이 천막을 떠나도, 이 씨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부인과 남았다. 2008년 5월 9일 강제철거, 이 씨의 삶을 뒤바꾸다 이 씨네가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4년 전 운영하던 가구공장에 화재가 나면서 거리로 나섰다. 뻥튀기, 막노동 등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래도 커가는 두 아들 때문에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강제 철거 당한 날 모든 행복은 끝났다. 그날은 2008년 5월 9일이었다. 이날 이후 이 씨의 삶은 또한번 달라졌다. 당시 가족들은 몸만 챙겨 나오기 바빴다.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들은 교복도 챙겨나오지 못해 두 달 동안 사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이 씨가 그의 부인과 함께 전국철거민연합에 가입, 철거민 운동에 나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철거민 혼자서 싸우긴 힘들어서 뭉쳤다는 게 이 씨와 함께 철거 당한 후 전철연에 가입한 최완경 씨의 증언이다. 최 씨에게 이 씨는 ‘불의를 못참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이 많고, 사나이답게 의리가 있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한 것은 깨끗이 사과하고 털어버리는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정이 많아서였을까.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도 이 씨는 종종 나섰다. 이 씨는 철거민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도 다른 철거 지역에 연대를 하러 나갔다. 철거민들은 연대를 품앗이라고 말했다. 누가 그를 철거민 운동가로 만들었나 용산 철거 역시, 그냥 뉴스만 지켜보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적어도 이 씨 자신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천막에 사는 지금, 생계를 꾸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자녀들이 커서 생활비를 스스로 벌게 된다면 조금씩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씨는 용산 철거민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나기 하루전인 19일, 서울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 회원들이 경찰이 소방호스로 쏘는 물세례를 피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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