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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누가 이성수 씨를 철거민 운동가로 만들었나

등록 2009-01-29 14:48

고(故) 이성수씨가 용산 철거민 문제에 뛰어들기 전까지 살던 집. 천막 뒤로 ‘세계최고, 선진용인’이라고 써있는 현수막이 보인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고(故) 이성수씨가 용산 철거민 문제에 뛰어들기 전까지 살던 집. 천막 뒤로 ‘세계최고, 선진용인’이라고 써있는 현수막이 보인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사회] 2008년 5월 9일, 그의 삶을 뒤바꾸게 만든 강제철거
경기 용인시 신봉리 아파트 공사 현장 앞 천막. 지난 20일, 용산 철거민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상인들에게 장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외치다 사망한 고(故) 이성수(50)씨가 마지막까지 살던 집이다.

아파트 공사 현장 앞 천막, 고(故) 이성수씨가 살던 집

겉으로 보기엔 아파트 공사 자재를 쌓아둔 창고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이 씨가 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임시로 만든 주방에는 먼지 쌓인 냄비와 빈 물병이 있었고, 시멘트 바닥보다 차갑던 단 칸 방에는 이씨가 평소 사용한 이불가지가 널려 있었다.

냉장고 대신 사용한 아이스박스 하나, 차가운 겨울밤을 견디게 한 열풍기와 전기 장판 하나만이 여름에도, 겨울에도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천막 앞, 50m도 되지 않는 거리, 지금은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그곳이 이 씨가 그의 부인, 두 아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던 자리였다. 누군가에게 보금자리일 새 아파트가 땅 위에 솟고 있지만, 이 씨가 살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이 씨가 철거당한 때는 지난해 5월. 주거이전비나 이사비용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 철거당한 이웃 4명과 함께 천막을 지었고, 그때부터 이곳 천막이 이 씨가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재개발은 이 씨에게 천막을 지을 땅도 허락하지 않았다. 용역업체 직원들은 천막마저도 강제 철거했고, 그때마다 이 씨는 천막을 다시 지었다. 생계 난을 이기지 못한 이웃들이 천막을 떠나도, 이 씨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부인과 남았다.

2008년 5월 9일 강제철거, 이 씨의 삶을 뒤바꾸다

이 씨네가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4년 전 운영하던 가구공장에 화재가 나면서 거리로 나섰다. 뻥튀기, 막노동 등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래도 커가는 두 아들 때문에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강제 철거 당한 날 모든 행복은 끝났다. 그날은 2008년 5월 9일이었다. 이날 이후 이 씨의 삶은 또한번 달라졌다.

당시 가족들은 몸만 챙겨 나오기 바빴다.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들은 교복도 챙겨나오지 못해 두 달 동안 사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이 씨가 그의 부인과 함께 전국철거민연합에 가입, 철거민 운동에 나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철거민 혼자서 싸우긴 힘들어서 뭉쳤다는 게 이 씨와 함께 철거 당한 후 전철연에 가입한 최완경 씨의 증언이다.

최 씨에게 이 씨는 ‘불의를 못참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이 많고, 사나이답게 의리가 있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한 것은 깨끗이 사과하고 털어버리는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정이 많아서였을까.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도 이 씨는 종종 나섰다. 이 씨는 철거민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도 다른 철거 지역에 연대를 하러 나갔다. 철거민들은 연대를 품앗이라고 말했다.

누가 그를 철거민 운동가로 만들었나

용산 철거 역시, 그냥 뉴스만 지켜보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적어도 이 씨 자신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천막에 사는 지금, 생계를 꾸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자녀들이 커서 생활비를 스스로 벌게 된다면 조금씩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씨는 용산 철거민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나기 하루전인 19일, 서울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 회원들이 경찰이 소방호스로 쏘는 물세례를 피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용산 참사가 일어나기 하루전인 19일, 서울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 회원들이 경찰이 소방호스로 쏘는 물세례를 피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씨는 왜 자신의 일이 아닌 용산 철거민들의 일에 뛰어들었을까. 검찰이 전철연 회원들을 대상으로 수사하는대로 뒷돈 때문이었을까. 일부는 그를 화염병을 던진 과격 시위 꾼으로 보고 있는데, 이런 평가에 대해 이 씨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한 사람은 있지만, 대답할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분명한 것은 2008년 5월 철거 당하기 직전에, 이사비용이나 주거이전비를 받고 최소한의 생활비가 마련되었다면, 애시당초 이 씨는 철거민 운동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씨를 평소 형으로 부르며 따랐던 최 씨는 용산 참사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참만에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말한 이 씨는 “어떻게 저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느냐”고 답답해했다.

마지막으로 최 씨는 “힘없고 돈 없는 서민을 위한 정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이 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가진자들이 좀 베풀어주어야한다”고 밝혔다.

정혜규 기자 669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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