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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의 얼굴이란 다마네기다”

등록 2007-09-05 17:35수정 2007-09-05 17:48

이상과 금홍의 연애담을 그린 영화 <금홍아, 금홍아>
이상과 금홍의 연애담을 그린 영화 <금홍아, 금홍아>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여자여자

이상은 근대문명을 비판한 작가다. 그건 모두 ‘다마네기’의 연애술을 선보인 소녀들 덕분이다. 이상 소녀 열전, 그 첫번째는 ‘봉별기’의 금홍이. 금홍이는 밤이나 낮이나 이상이 누워서 잠만 자니까 심심해서 밖으로 나가 심심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 심심치 않게 놀고 돌아와서도 어쩐 일인지 자랑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금홍이와 헤어지고 나서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내 눔 하나 보고져서 서울 왔지, 내 서울 뭘 허러 왔다디?” “그러게. 또 난 이렇게 널 찾아오지 않었니?” “너 장가갔다더구나.” “얘, 디끼 싫다. 그 육모초 겉은 소리.” “안 갔단 말이냐, 그럼?” “그럼.” 그러자 당장에 목침이 내 면상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는, 아픈 문장이 이어진다.

두번째 여자는 ‘실화’의 연이. 연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데 천재다. 남대문 N빌딩에서 나오기 전에 이 아웅의 천재가 ‘WC’라는 곳에 잠깐 들리겠다고 하더니 나와서는 이런 문제를 낸다. “이 연이가 조 2층 바른편에서 둘째 S씨의 사무실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알아맞히면 용하지.” 전날 밤에는 그와 만나서 사랑과 장래를 맹세하고 그 이튿날에는 기싱과 호손을 배우고 밤에는 S와 같이 옷을 벗었던 연이가 과연 거기서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무슨 수로 그가 맞힐 수 있을까?

세번째는 ‘종생기’의 정희. 공포에 가까운 변신술을 보여주는 소녀다. 이 소녀가 이상 선생에게 “R과도 깨끗이 헤어졌습니다. S와도 절연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된다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믿어주시는 바지오?”라는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흥천사 으슥한 구석 방 한 칸에서 접전을 벌이는데 결국 이상은 술이 취해서 정희의 스커트에 오바이트를 한 뒤, 창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주사를 부린다. 그를 안 말리는 듯 말리는 정희의 스커트에서 다음과 같은 S의 편지가 떨어진다. “정희! 노하였오. 어젯밤 태서관 별장의 일! 그것은 결코 내 본의는 아니었소.” 이상 선생으로서는 부글부글 끓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초절정의 연애 기법을 보여주는 건 ‘단발’의 선이다. 오빠가 자기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이는 고독을 느끼고 어느 날 밤 그만 별안간 혼자 울어버린다. 그 다음날 선이는 그가 하자는 대로 교외의 조용한 방에 마주 앉는다. 그러고선 다음 날 친구와 동경에 가니 이제 또 만나 뵙기 어렵다고 말하는데, 이게 찬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던 남자는 “그래? 그건 섭섭하군. 그럼 내 오늘밤에 기념스탬프를 하나 찍기루허지”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을 늘어놓다가 그만 아무 일도 없이 새벽 1시의 산길을 내려온다.

나중에야 동경에 가는 사람은 친구인 선이의 오빠와 그녀의 여자친구라는 걸 알게 된 남자는 그날 밤, 선이가 자신의 거친 행동을 몹시 기다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동경에 가자는 프러포즈가 담긴 편지를 선이에게 보낸다.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이에 대한 선이의 답장은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하지 않았나요? 저는 지금 조금도 흥분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로 시작해서 “단발했습니다. 이렇게도 흥분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냥 미워서 그랬습니다”로 끝난다.

골든벨 50번째 문제를 앞에 둔 고등학생처럼 소녀들 앞에서 이상 선생은 불안하다. 모던 연애는 퀴즈쇼 같은 것이니까. 소녀들이 뭔가를 감추는데,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상은 불안하다. 나중에 동경에 간 이상은 불어로 얘기하는 미술가 나미코 씨와 극작가 Y군 앞에서 그 말의 뜻을 몰라 그만 울어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N빌딩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의 사무실? 계집의 얼굴이란 다마네기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상은 천재다. 하지만 왜 소녀가 갑자기 머리칼을 자르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면 이상은 천재가 못 됐을지도 모른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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