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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래된 양조장을 찾습니다”

등록 2007-10-03 22:24수정 2007-10-07 18:27

항아리 속에서 흑미로 빚은 술이 익어가고 있다.
항아리 속에서 흑미로 빚은 술이 익어가고 있다.
[매거진 Esc] 허시명의 알코올트래블
‘3대 가업의 민족기업’과 ‘문화유산’ 인증받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 세왕주조
오늘은 공지부터 해야겠다. “오래된 양조장을 찾습니다. 아시는 분은 저의 전자우편(twojobs@empal.com)으로 연락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오래된 양조장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디 양조장뿐일까. 우리는 오래된 것을 낡은 것이라 여겨, 아주 쉽게 버린다. 컴퓨터와 휴대전화기의 업그레이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버린다. 이점이 아이티(IT) 강국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문화의 영역에 적용되면 소름끼칠 일이다.

백두산 전나무 가져와 1930년대에 짓다

흔히 좋은 술의 조건으로 첫째 물, 둘째 재료, 셋째 기술을 꼽는다. 나더러 꼽으라면, 이 셋 사이에 ‘세월’을 끼워넣겠다. 꼭 오래 숙성시킨 소주가 좋고 오래 발효시킨 약주가 좋아서만은 아니다. 300년째 양조업을 이어오고 있다는 외국의 젊은 양조업자를 만났을 때, 내 눈에 그가 300살 된 우람한 나무로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은 어디일까? 가장 오래도록 양조업을 이어온 사업체는 어디일까? 과문한 탓인지 나는 모른다. 알려진 바도 없고, 누가 비교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찾아보려고 하는데 기본 조건은, 양조장은 처음 지어진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고, 술 빚는 양조장은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왔을 것이다.

주류 품평회에서 받은 상장들이 벽에 걸려 있다(왼쪽사진). 막걸리를 빚느라 밀가루를 쪄두었다(오른쪽위사진). 세왕주조 외벽에 붙은 문화재 자료 지정 현판(오른쪽아래사진).
주류 품평회에서 받은 상장들이 벽에 걸려 있다(왼쪽사진). 막걸리를 빚느라 밀가루를 쪄두었다(오른쪽위사진). 세왕주조 외벽에 붙은 문화재 자료 지정 현판(오른쪽아래사진).
오래된 양조장을 수소문하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등록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된 양조장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밝혀야겠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에 있는 세왕주조로, 대전 지방 국세청에서 “3대 가업의 민족기업”이며 “전통 향토기업 지정업체”라고 인증하고, 문화재청에서 “이 문화재는 우리가 소중히 가꾸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입니다”라고 인증하고 있는 곳이다. 인증 현판이 세왕주조 어귀에 붙어 있는데, 어떤 칭찬보다도 명예로운 찬사다.

세왕주조는 백두산에서 전나무를 가져와 지었다. 통풍을 위해 냇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잘 받을 수 있도록 건물 방향을 잡고, 지붕 위는 통풍구를 마련하고 비가림 갓을 씌워 놓았다. 건물은 단층인데 3층 높이쯤 된다. 외벽은 나무 판자가 비늘처럼 덧대져 있는데 썩지 않도록 검은 도료로 칠을 했다. 양조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한때 일꾼들의 숙소로도 쓰였던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 안에는 1950년 말에서 1960년대 초반에 전국주류품평회에 나가서 받은 상장들이 걸려 있다. 국세청에서 오래전에 내려 보낸 술 제조 포스터도 빛바랜 채 걸려 있다.


사무실 앞쪽에 쌀 씻는 곳이 있고, 누룩방이 있고, 발효실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쌀이나 밀가루를 찌는 곳이 있고, 술 거르는 곳이 있다. 쌀이나 밀가루를 찌는 장비만 새롭게 들여왔지, 다른 시설들은 1930년대 풍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발효실의 항아리에는 “1935 龍夢製”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1935년에 양조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용몽(龍夢) 가마터에서 빚은 항아리다. 물론 그 가마터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3대째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규행씨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꼭 보여주는 게 있다. 양조장 천장 대들보에 적힌 1930년에 상량했다는 글귀다. 외부 온도를 차단하느라 천장에 1m 두께로 둔 왕겨 속에 숨어서 아버지는 전쟁의 화를 피했고, 할아버지는 28살에 처갓집 땅을 잡혀 이 건물을 지어 3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는 이야기도 이규행씨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

천장 높은 세왕 주조장 내부(왼쪽사진). 덕산약주(오른쪽사진).
천장 높은 세왕 주조장 내부(왼쪽사진). 덕산약주(오른쪽사진).
양조장 앞을 서성이는 노인들의 정체

때때로 이규행씨는 양조장 앞을 서성이는 노인들을 본다고 했다. 그 노인들은 십중팔구 덕산이 고향인 사람들로, 덕산을 떠나 살다가 오랜만에 찾아와 낯설어하다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양조장을 발견하고서 비로소 감회에 젖어드는 이들이라고 했다. 정자나무도 없어진 동네에, 오래된 양조장이 정자나무 대신에 서 있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허시명의 알코올 트래블
허시명의 알코올 트래블
세왕주조는 막걸리도 만들고, 덕산약주도 만들고, 흑미를 재배하는 인근 농가와 연대하여 흑미 와인도 만든다. 술맛이 좋아, 인근 대도시에서 인기가 높다. 소규모 양조장으로서는 드물게, 날마다 술을 빚는다. 세월의 관록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있는 셈이다.

술은 정체를 알기 어려운 기호식품이다. 처음 대하면 눈으로 흘기고, 코로 탐색하고, 입술로 다시다가, 숙취가 있을지 몰라 하며 몸으로 의심한다. 그러나 한번 믿음을 주면 친구처럼 쉽게 받아들인다. 그 친구가 80년 되고, 300년 되었다면 얼마나 좋으랴.

허시명 여행작가·술품평가

세왕주조 홈페이지(icnj.co.kr)에 전통술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가 있다. 연락처는 043-536-35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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