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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 피하려면 저 골목으로…”

등록 2007-11-14 17:56수정 2007-11-14 18:01

1998년 경찰과 대치 중인 인도네시아 국민들. 소도시에서 시작한 식량 폭동은 대도시로 번져갔다. 아에프페 연합
1998년 경찰과 대치 중인 인도네시아 국민들. 소도시에서 시작한 식량 폭동은 대도시로 번져갔다. 아에프페 연합
[매거진 Esc] 닉 히스의 ‘호텔에서 생긴 일’ ⑦
객실 점유율이 10%까지 떨어지던 인도네시아 폭동 시절은 ‘제2의 대학’

특이한 손님들이 기억 나네요. 인도네시아 하얏트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어느 날 50대로 보이는 한 백인 손님이 로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벌게져서 지배인을 찾으며 화를 내는 거예요.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왜 호텔에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느냐”고 항의하더군요. 공항 검역소를 통과했는데 왜 호텔에 들여보낼 수 없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애완견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당시 저희 호텔은 개나 애완동물을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지 독일인지 국적은 기억도 안 나네요. 아무튼 그는 막무가내로 개를 데리고 객실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그러나 예외를 허용할 순 없었습니다. 한동안 그 손님과 실랑이를 벌였죠. 지금껏 수많은 손님을 만나봤지만 제게 소리 지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죠. 그는 결국 개를 호텔 바깥 철망에 두고 지내야 했습니다. 만약 지금 W호텔이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다툼입니다. W호텔은 개를 막기는커녕, 주인과 애완견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운영중이니까요. 10년 전에 저는 개를 들일 수 없다고 뻗댔지만, 지금은 외려 “개를 환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재미있지 않나요?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호텔들은 애완견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1990년 미국 하얏트에서 본 재미난 손님들이 떠오르네요. 어느 날 복음 전도자들이 떼로 체크인을 했습니다.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이 있었죠. 그들은 객실 안에서 부흥회를 열더군요. 객실에서 “할렐루야” 를 외치고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대단했죠. 예배가 끝난 직후였어요.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나 화재 냄새가 아니라 맥도날드에서 나는 냄새였지요. 이상한걸? 어디서 나는 냄새지? 주방은 아닌데. 냄새를 따라가 봤죠. 웬걸, 객실에서 대여섯 명의 복음 전도자들이 다리미 위에 고기를 굽고 있더군요. 돈을 아끼려고 그랬던 거죠. 어찌나 황당하던지.


인도네시아 시절 얘기를 할게요.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호텔리어로서 실무 훈련을 받는 시간이었죠. 인도네시아에 1995년 도착했는데 곧바로 이듬해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걸로 기억나네요.(*수하르토 독재정권이 야당 당수를 탄압하자 96년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외환위기가 겹쳐 2년간 시위와 폭동이 잇따랐고 98년 수하르토가 사퇴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시위, 폭동이 벌어졌고 건물들이 불탔죠. 97년에는 전 아시아를 덮친 외환위기가 벌어졌죠. 겨우 정신 차리나 싶더니 98년에 다시 폭동이 벌어졌습니다. 2000년에는 동티모르 독립운동이 벌어졌고, 2001년에는 미국과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죠. 발리에서 폭탄 테러가 터진 게 2002년이던가요? 정말 어려운 시기였어요.
닉 히스 W서울워커힐호텔 총지배인
닉 히스 W서울워커힐호텔 총지배인
돈 가치는 떨어지고 전망은 어두웠죠.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국가입니다. 형제 이슬람국가가 침공당했으니 인도네시아 여론이 좋을 리 없었죠. 외환위기 때 환율이 너무 올라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뚝 끊겼습니다. 돈 흐름도 경색됐죠. 외환위기 당시 저는 자카르타의 특급호텔에서 근무했습니다. 외환위기 때 호텔업 전망이 어두워지자, 600여명이던 직원이 저절로 500명으로 줄더군요. 그 당시 호텔 객실점유율은 무려 10%로 뚝 떨어졌습니다.

다리미에 고기를 굽던 복음 전도자들

폭동이 곳곳에서 벌어지던 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수라바야에서 근무했습니다. 거기서 전 불과 서른한살의 나이에 총지배인이 됐죠. 500개의 방에 670명의 직원이 있는 호텔이었어요. 그러나 전 모든 것에 서툴렀습니다. 게다가 폭동으로 거리 곳곳이 불탔죠. 한마디로 말해, 모든 것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매일 아침 호텔 로비에 수라바야 시내 지도를 걸어놓고 몇 안 되는 손님들을 모아놓고 브리핑을 했어요. “오토바이 갱들을 피하려면 이쪽 골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매일 아침 변화된 거리 상황을 지도에 표시했죠. 별별 일을 다 겪었어요. 제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고들이 터졌고 정확히 제가 떠날 때쯤 상황이 나아졌죠. 그렇지만 많은 걸 배웠어요. 인도네시아는 제게 ‘제2의 대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W서울워커힐호텔 총지배인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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