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리심>은 ‘역사 이야기꾼’ 김탁환(38)씨의 세 권짜리 장편소설이다. 구한말 프랑스 공사의 눈에 띄어 조선 여성으로서는 (아마도)처음으로 프랑스로 건너갔고 내처 아프리카 모로코 땅까지 밟았던 실존 인물 ‘리심’을 주인공 삼았다. 리심에 관한 기록은 제2대 프랑스 공사 이폴리트 프랑댕(Hippolyte Frandin)의 견문기 <한국에서>(1905년)에 처음 나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 궁중 무희였던 리심(Li Tsin)은 1893년 5월 초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3)와 함께 파리로 갔으며 이듬해 10월에는 모로코로 건너갔다. 1896년 3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플랑시와 함께 귀국해 궁중 무희로 복귀했으나 금 조각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리심>은 프랑댕의 기록에 충실하게 리심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한편, 이 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맛보았을 문화 충격을 통해 서구 근대와 만나는 아시아적 봉건의 내면 풍경을 흥미롭게 직조해 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리심이 도쿄와 파리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의 충격, 엄연히 유별한 남과 여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파티에 대한 놀람, 유럽의 심장 파리에서 ‘노란 원숭이’로 놀림 받을 때의 고통, 혁명을 거친 프랑스 헌법이 만인의 평등을 천명하고 있는 데 대한 경이와 감동, 그리고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는 아프리카 베두인 전사들과의 만남까지…. 프랑댕은 예의 책에서 “리심은 자신이 관찰한 놀라운 서양 문물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기록해 두었는데, 나는 언젠가 그 기록들을 꼭 출판하려고 다짐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리심의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리심의 짧고 극적인 생애는 격변의 와중에 있던 구한말 조선의 내정과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을 나이테처럼 새기고 있기도 하다. 궁중 무희로 발탁되기 전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 주었던 홍종우, 그리고 궁중 내에서 그가 의지했던 김옥균은 리심의 은인인 동시에 그의 한정된 세계 내에서는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사’로서 나란히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왕조질서 자체를 변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김옥균과 왕권 강화를 주창했던 홍종우가 대립하고 결국 홍종우의 손에 김옥균이 살해당하면서 리심의 세계 이해는 혼란 속에서도 깊어지게 된다.
리심과 플랑시의 위태로운 사랑이 역사의 급류에 얹혀 요동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비극적 숭고미에 가까운 육박한다. 일·청·러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프랑스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고종은 리심을 미끼로 플랑시를 회유하려 하지만, 플랑시는 프랑스 공사로서의 공적 처신과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적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 리심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는, 사랑밖에는 다른 힘이 없었던 리심의 자진. “나는 미개한 나라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한 슬픈 영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욕망을 억제할 수 없다”고 프랑댕은 적었거니와, 프랑댕의 그런 욕망은 김탁환씨의 소설에서 대리 충족된 셈이다.
리심의 이야기가 작가 신경숙(43)씨에 의해 별도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흥미거리다. 김탁환씨의 <리심> 전반부가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되기 직전, 신씨는 <조선일보>에 <리진 푸른 눈물>이라는 제목의 소설 연재를 시작했다. 두 작가는 서로의 작업에 대해 사전에 모르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다른 데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다. 신씨는 2002년에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역 출간된 <한국에서>의 표기 ‘리진’을 택했고, 김씨는 ‘Li Tsin’의 뜻을 ‘영혼의 꽃’으로 풀었던 프랑댕의 해석을 감안해 ‘배꽃의 마음(李心)’으로 헤아렸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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