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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가함 노래한 린위탕…이제 와 그를 그리네

등록 2006-07-27 19:27수정 2007-04-26 16:07

린위탕은 “중국인들은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깝다”며 중국인의 유한자적 자질을 찬미했다. 그림은 노자가 늙은 소를 타고 두루 돌아다니며 자연방임과 무위를 즐기는 모습.
린위탕은 “중국인들은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깝다”며 중국인의 유한자적 자질을 찬미했다. 그림은 노자가 늙은 소를 타고 두루 돌아다니며 자연방임과 무위를 즐기는 모습.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이요, 중국인들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이다”
린위탕은 중국인의 유한자적 기질 찬미했으나 바쁜 미국인보다 더 바빠진 중국인
그를 통해 ‘노장의 천성’ 되찾고자 하는가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⑦

한때 나는 린위탕(임어당)의 책을 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적(閑適, leisure and comfortable), 성령(性靈, human spirit), 유머를 주장한 그의 사상이 너무 한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가 쓴 루쉰의 추도문을 읽게 되었는데, 그 후 나는 린위탕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 린위탕이 루쉰을? 그것은 루쉰을 문인이라기보다는 <수호지>에 나오는 노지심(魯智深)과 같은 전사(戰士)로 아주 생동감 있게 묘사한 독특한 추도문이었다. 루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 속에는 은은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루쉰과 나는 두 번 서로를 얻었고, 두 번 멀어졌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루쉰과 나 사이에 고하나 우열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루쉰을 존경했다. 루쉰이 나를 알아봐 주었을 때 나는 서로 알게 된 사실을 기뻐했고, 루쉰이 나를 버렸을 때도 나는 후회는 없었다. 대체로 본 바가 서로 다르기도 했고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데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은 없었다.”

바쁜일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라

린위탕은 1936년 8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사실 궁지에 몰려 있었다. 국민당과 좌련(左聯)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더욱이 루쉰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영문으로 쓴 <내 나라 내 국민>이라는 책이 국외에서 반응이 좋았다. 펄 벅의 초청도 있고 국내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공포 등이 겹쳐 그는 미국행을 단행했다. 사실 “구망(求亡, 망국을 구하는 일)이 계몽을 압도하던” 시기에 그의 유머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몇 달 뒤 루쉰은 죽었고 린위탕은 뉴욕에서 루쉰의 부음을 접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글을 보고 린위탕에 대해 ‘애정’이 생겼다. 그 후 서가에 오랫동안 외롭게 꽂혀 있던 <생활의 발견>(1937)을 발견했다. 책을 펴자 “사람이 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공자의 말과,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서두르는 일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세상 사람들이 한가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바쁠 수 있다.”는 장조(張潮)의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전에도 알고 있는 말이었건만 내가 변했는지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둘 다 변했는지 아주 새롭게 와 닿았다.


1919년에 결혼한 린위탕이 신방을 차렸던 집. 샤먼의 구랑위라는 작은 섬에 있다. 린은 여기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곳엔 지금도 그의 부인의 조카가 살고 있다.
1919년에 결혼한 린위탕이 신방을 차렸던 집. 샤먼의 구랑위라는 작은 섬에 있다. 린은 여기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곳엔 지금도 그의 부인의 조카가 살고 있다.
공자의 이 말은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라는 루쉰의 말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진리를 ‘자유롭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공자에서부터 루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중국적 전통이 아닐까. 사실 마오의 대장정이라는 것도 국민당의 포위에 몰려 도망치다가 항일을 기치로 새롭게 만들어낸 길이 아니겠는가. 병불염사. 병법에서는 적을 속이는 것도 꺼려하지 않는 법. 규칙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별안간 뜬금없이 들었다.

또한 <유몽영(幽夢影)>이라는 책에 나오는 장조의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엔 바쁘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한가하다고 자주 비판받는 나를 위해 준비해둔 말처럼 들렸다. 사실 이 말은 린위탕이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으로 유명하고, 중국인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하면서 중국인의 “위대한 유한자(悠閑者)”적 기질을 찬미하고자 사용한 말이지만…. 정말 지금도 베이징의 골목이나 공원에 가보면 이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몽영>은 특히 요즘 같은 휴가철에 나무 그늘 같은 곳에 앉아서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해가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힐 수 있지만,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 “자신을 다스릴 때는 가을 기운처럼 해야 하고, 처세는 봄기운처럼 해야 한다.”, “젊은이는 노인의 식견을 가져야 하고 노인은 반드시 젊은이의 흉금을 가져야 한다.” 등등

‘유몽영’ 구절 휴가철에 곱씹을만

린위탕(1895-1976)은 푸젠성 룽시현(현 장저우)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아주 독특하게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교회에서 세운 학교에서 주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상하이의 성 요한대학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현 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나중에 서양에 중국문화를 알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그였지만 이 당시까지 그는 중국문화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다. 교사생활 동안 <홍루몽> 등을 아주 열심히 공부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한 기초를 비로소 다지게 된다. 당시 칭화대학에는 3년 동안 재직하면 학교에서 유학을 갈 수 있게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규정이 있었다. 보조금은 매월 40달러. 3년 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다시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린위탕.
린위탕.
재미있는 일화 하나. 린위탕은 유학 시절 후스(胡適)로부터 두 번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한번은 미국유학 시절 아내의 수술 때문이고 다른 한번은 독일에 있을 때 매달 보내오던 칭화대학의 보조금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시 돈으로 모두 1500달러. 린위탕은 베이징 대학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한 후 바로 후스를 찾는다. 그러나 그때 마침 후스는 휴가를 내고 남쪽에서 요양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린위탕은 이 돈을 평생 갚지 못한다. 나중에 후스 사후에 린위탕이 토로한 이야기다. 후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사상적으로도 가까웠지만 귀국 후 의외로 루쉰이 이끌던 <어사>파에 가담한다. 이 잡지는 후스의 <현대평론>파와 당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글쓰기 연습을 하는 듯한 <현대평론>보다 진심을 토로하는 <어사>의 방일(放逸)한 논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사건 때 린위탕은 루쉰과 함께 학생 편에 서서 교육계와 학교 당국에 맞서기도 하고 중국민권보장동맹회의 중요 멤버였던 ‘운동권’ 교수였다. 그들은 동료였지만 루쉰이 린위탕보다 14살이 많았다. 루쉰과 그의 동생 저우쭤런의 영향하에서 린위탕은 도가사상과 만나게 된다. 루쉰과 저우쭤런은 모두 도가와 도교가 중국문화와 중국인의 민족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 바가 있었다. “우리들(중국인)은 공부자의 팻말을 걸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장자의 사숙제자이다.” 루쉰의 말이다. <내 나라 내 국민>에서 린위탕은 “중국인들이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까운 것이 교육을 통해 공자사상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심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루쉰 영향으로 도가 심취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미국으로 건너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판한 <생활의 발견>(참고적으로 말하면 중국판 제목은 ‘生活的藝術’이다)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심미적인 눈으로 생활을 즐기라고 하는 도가의 주장이 중국인의 생활을 예술화시켰다고 설파했다. 또한 <홍루몽>의 체제를 모방한 <경화연운(京華煙雲>(1939)을 창작하는 등 미국에서 생활했던 30년 동안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40년대에 들어서 급격히 장제스의 국민당에 기울면서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하고, 1966년에 타이완에 정착하는 등 대륙과는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륙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연설과 여자의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식 난방이 된 영국 스타일의 방에서 중국인 주방장을 고용하고 프랑스 여자 친구를 사귀며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우리도 예전에 언젠가 듣고 함께 웃었던 ‘통 큰’ 유머가 계급투쟁에 몰두했던 중국에서 환영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츰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다가 작년에는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이미 80년대 말에 타이완에서 드라마화되었던 <경화연운>을 다시 제작해서 대히트하는 등 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했다.

최근 중국을 다녀온 사람에게 소감을 물으니 한마디로 “중국은 공사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으로 유명하고, 중국인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했지만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미국인보다 훨씬 바쁘게 살고 있고, 또 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한가함을 노래한 그의 책들이 새롭게 환영받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신좌파’적인 루쉰과 자유주의적인 후스 사이에서 또 다른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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