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너무 피곤해 더는 못참겠어”
요절 희곡작가 콜테스의 비참한 인물들은
그밖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듯 죽도록 말을 한다
읽을수록 허기져 살아있다는 느낌, 울음이 터진다
요절 희곡작가 콜테스의 비참한 인물들은
그밖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듯 죽도록 말을 한다
읽을수록 허기져 살아있다는 느낌, 울음이 터진다
나는 요즘 요절한 프랑스 희곡작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1948-1989)의 작품들을 읽으며 지내고 있다. 그가 쓴 <로베르토 쥬코>, <서쪽 부두>,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목화밭에서의 고독> 등이 번역 출간되어 있어 독자들도 찾아 읽기 쉽다. 매력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의 희곡들은 시적인 언어로 “한 순간도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지 못한” 인물과 “너무 썩었고, 그런 방법으로는 오래 갈 수 없는” 세상과의 적대적 관계를 유려하고도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희곡을 거의 독백에 가까운 말들로, 그것도 운문으로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드문 일이다. 그래도 그의 희곡들은 세상 곳곳에서 읽히고 있고, 오늘날 현대연극을 대표할 만큼 널리 공연된다. 넋 놓고 살다가 문득 그의 희곡을 읽다보면, 가령 “나는 늘 허기질 거야, 허기지지 않는다는 건 죽은 거야”라는 <서쪽 부두>에 나오는 한 구절에 이르게 되면 손에 든 희곡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하게 된다. 내 앞에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이 있다고 깨닫는 순간이다.
콜테스의 희곡들은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버려진 거리, 오래된 도시의 버려진 창고 같은 존재의 텅 빈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물들은 칠흑 같은 어두운 벽 앞에 놓여 있다. 그곳은 불안과 고독의 영토이다. <서쪽 부두>의 첫 장면은 인물이 등장하자마자 “그래서? 어디로? 어딜 통해서? 어떻게?”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질문은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도저한 거부이다. 그리고 “벽이야, 더 이상 갈 수 없어. 벽도 아니네.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길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강이나 구역질나는 커다란 구멍일 뿐인 공터일 수도 있지.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아. 너무 피곤해, 더 이상 못 참겠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라고 이어지는 말은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인물들이 겪는 고독과 위험이 배고픈 개가 되어 크게 울부짖는 말 속에 묻어 있다. 무엇 때문일까? 언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말들의 과잉은 인물들이 말할 뿐, 그 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것만이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말하고 싶은, 그 정열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비유하자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 죽겠는 아이가 급하게 말을 하듯, 인물들은 죽도록 말한다. 말을 계속한다는 것은 자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기 위하여 말하는 고통스러운 반복의 행위이다. 한 사람의 대사가 예닐곱 장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그의 희곡을 읽을수록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진다. 그의 희곡들은 독자에게 배우처럼 말하고 싶은, 말하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정열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독자가 작품 속에서 자신을 하나의 인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와 같다. 오늘도 나는 몇 번 소리 내어 무대 위에 서있는 배우처럼 읽었다. 폭력, 가난함, 인종차별,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말하는 그의 희곡들을 읽고나면, 읽으면서 나간 길을 되돌아오게 된다. 돌쩌귀에 끼워져 있던 인물들이, 세상이 본디 모습을 되찾는 것 같다. 그것은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콜테스 희곡의 배경은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날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요”라고 절규하는 고독한 이들이다. 등장인물들의 고독은 그들이 가슴 속에 지닌 상처이다. 인물들의 고독은 “주위를 둘러봐, 아무 것도 없어. 구석구석 찾아봐, 땅을 파 보라구, 머릿속을 뒤져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 어디에도 꿈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아,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자신의 내면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콜테스는 <서쪽 부두>에 나오는 한 인물의 대사처럼, “어느 날, 난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거야. 그럼 넌 나를 마지막으로 본 장소를 기억하게 되겠지. 나를 보러 그곳에 가면 난 거기 더 이상 없을 거야. 그런 거지”라고 쓰고, 작품 속에 체류하지 못하고 삶을 끝장냈다. 작가의 이른 죽음은 작품과 독자의 무한한 방황이다. 그런 탓일까? 콜테스의 인물들은 희곡 속에서 자주 운다. 그리고 익명의 독자들도 인물들을 따라 운다.
콜테스의 희곡을 읽고 흘리는 독자의 눈물이란 무엇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가르칠 자신이 없는” 작가와 작품 앞에 홀로 서있는 존재로서 독자를 생각한다. 더 이상 제 자리에 머물 수 없게 된, “혼자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독자는 콜테스를 읽을수록 제 삶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분산, 균열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독자가 숨막히는 경험, 벌거벗은 채 배회하는 경험이다. 독자의 울음은 헐벗은 채 추위 속에 내맡겨지는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듯하면서 동시에 충만해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울음이 터져나오게 된다. 이것이 콜테스의 희곡이 지닌 매혹이고, 세상을 떠나버린, 부재하는 작가와의 접촉이다. 읽을수록 그의 작품에 매혹당한다. 무한한 깊이를 지닌 그의 희곡을 읽을수록 허기져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한, 작가와 독자 그리고 작품과 독자가 가려움증으로 맺어진 관계일 것이다.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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