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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한국인들은 ‘연애질’만 하고 사나?

등록 2006-08-23 21:22

지금은 방송중
드라마가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은 내 짧은 방송이력서에 작품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답이 다르다. 특히 요즈음처럼 드라마 보는 이들이 줄어들고 우리나라 드라마들도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일 때 그런 고민의 강도는 점점 심해진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모른 채 원고를 쓰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방송에 대한 범죄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했다. 죄와 벌, 폭력, 종교, 이혼, 죽음 같은 무거운 문제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그 사건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단순했다.

다음 작품을 할 땐 무조건 재미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야기 유희의 기본 속성이고 경제도 힘들었고, 그땐 무엇이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효용성이 컸다. 드라마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작품을 할 땐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는 창작자로서 나만의 배설의 통로도 아니고, 무조건 웃자고 만들자는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간단히 취급하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개인으로서 쏟아내고 싶은 사랑타령이나 하자고 몇십억원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기 전엔 만져보지도 못하는 그 돈을 어떤 이야기에 어떻게 쓸 것인지 가장 중심에서 결정하는 작가가 되었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가는 업이고 천성이며 예술이지만 방송작가는 거기에 더해 서비스 마인드를 가지고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이 더더욱 힘들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라마에 내 한풀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가지지 못한 시절,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쏟아내는 건 일기장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드라마는 그런 한풀이 사랑이야기가 너무 많다.

남들 예를 들긴 뭣하지만 일본 등 외국 드라마들을 보면 작품을 지배하는 독특한 세계관과 철학, 그 안에서 성장하는 주인공들이 보인다. 어찌 보면 철학과 성장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방법은 많다. 사랑을 통해, 가족을 통해, 일을 통해, 친구를 통해 우리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성장한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는 주객이 바뀌었다. 모두들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 같다. 사랑을 통해 이루어야 할 개인의 성찰과 성장, 인생의 철학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그냥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끝이 난다. 수단이 목적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왜 더 깊게 가지 못할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연애질로만 돌아가거나 시청자들이 그 정도로 얄팍하진 않을 것인데 정작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얄팍하다. 그래서 트렌디드라마가 끝을 보게 되었다. “너를 갖고야 말겠어”, 혹은 “이 여자가 내 여자야”라고 소리치는 주인공들 말고,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주인공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강은정/드라마 〈파리의 연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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